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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익산 쌍릉 발굴과 역사왜곡!

  • 입력 2017.10.09 13:03
  • 수정 2017.10.09 13:04
  • 댓글 1

사적 제87호인 익산시 석왕동 ‘쌍릉’ 대왕릉과 소왕릉이 발굴된다. 익산시와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소장 최완규)는 2억5천여만원을 들여 대왕릉 발굴을 9월 25일부터 실시한다. 내년부터 별도 4억원으로 소왕릉 발굴과 외래수종 제거 등에 활용한다.

“발굴에 앞서 21일 대왕릉에서 무왕武王을 기리고 조사 무사안전을 기원하는 고유제를 진행한다.”는 자료가 배포됐다. 대왕릉은 무왕릉이고, 소왕릉은 선화공주릉이라는 전제 하에 발굴된다. 1917년 일본인 야쓰이세이치(곡정제일谷井濟一)에 의한 발굴 당시 석실과 금송제金松製 목관으로 부여 능산리고분군 왕릉에 견주는 무덤으로 보고된 바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쌍릉이 ‘무왕과 선화공주릉’이라는 것은 일부 사학계 주장일 뿐이다. 고려사절요,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한씨 족보 등에 백제 이전인 ‘마한馬韓 호(무)강왕虎(武)康王과 비릉이라거나 도굴범이 체포돼 탈옥한 기록‘도 나오고 규장각 소장 1872년 익산 군지도에도 무강왕으로 기록됐는데 “무왕 영령을 위무한다.”며 술잔을 올리는 어처구니다. 심지어 청주 한씨는 마한 무강왕을 시조로 섬겨 쌍릉 앞에 청주한씨 공적비도 서 있는데 말이다.

20년 가까이 익산 미륵사지와 석탑, 왕궁성과 5층탑, 쌍릉 등을 취재해 온 필자는 역사학계가 역사왜곡을 넘어 조작 우려가 적지 않다. 고구려·백제·신라는 물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중국과 일본 기록에도 없는 ‘익산천도설’이 사료로써 신빙성도 없고, 출처 및 발견과정, 내용도 불투명한 ‘관세음응험기’ 기록과 일부 유물만을 근거로 공공연하다. 정사正史에서 기록된 한성漢城(서울)백제(BC18~475)와 웅진雄鎭(공주)백제(475~538) 및 사비泗沘(부여)백제(538~660)와 달리 무왕(600~641) 재위기 일부 기간에 금마金馬(익산)백제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삼국유사의 “무왕과 부인이 사자사로 가던 중 미륵삼존이 출현해 부인이 ‘대가람大伽藍’을 세우기를 원해 미륵사를 세웠다.”는 내용에 사탁(택)왕후가 발원자와 시주자 및 ’가람伽藍‘ 건립자와 사리봉영(안)자임을 확증하는 2009년 1월 석탑 사리장엄 명문銘文 기록이 나왔음에도 8년여 째 사탁왕후는 언급도 없다. ’대왕폐하’와 왕후 앞에 국호가 붙어 정실왕후임을 나타내는 ‘百濟王后佐平沙乇積德女(백제왕후인 좌평 사탁적덕의 딸)‘이 ’근사정재조립가람‘謹捨淨財造立伽藍(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만들어 세웠다.)“와 ’봉영사리奉迎舍利(사리를 받들어 봉안했다.)‘ 기록에도 여전히 경주 선발 선화공주가 익산에서 뽑은 서동과 서동축제에 참여한다. 삼국유사 ’서동설화‘를 근거로 수십 년 ’신라 진평왕 셋째 딸 선화공주‘를 주장해온 사학계 허구가 탄로 날 것이 두려웠는지, 막대한 혈세가 들어간 무수한 지표조사와 시굴 및 발굴, 연구보고서와 책자. 강연 및 세미나는 물론 수많은 학·석·박사 학위가 무용지물이 될 것이 두려웠나?

발굴된 사리와 사리장엄 복제품을 재 봉안한 미륵사지석탑 복원이 90% 공정인데도 유독 사탁왕후는 언급이 없고 외부 사학자들이 진실을 말하는 듯하다. 봉안기 중에 “639년 기해년에 무왕이 사리장엄을 봉안한 사실이 밝혀졌다.”며 “삼국유사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와 일치한다.”고 인용하면서도 사탁왕후는 완전 무시하고 “무왕 재위가 41년이므로 왕후와 후궁이 한 두 명이었겠는가?“라거나 ”사라진 중앙탑이나 동탑에 선화공주가 별도 발원 및 봉안을 했을 것“이라며 사탁왕후와 선화공주를 별개 인물로 간주하며 봉안기를 얼버무린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기록 외에도 삼국과 후삼국 전투, 거란·여진·몽고·왜구 침탈, 임진·정유란, 병자·정묘호란, 일제강점기 등 무수한 전란과 도굴에다 1920년 총독부, 『조선고적조사보고서』 쌍릉조사 결과보고에 치아와 목관 일부만 수습됐음이 기록됐고 석실 사진까지 배포됐으며 훗날 복토했다는 기록에도 “피장자를 확인하고 일제 발굴과 보고서가 부실하다.”며 일반묘 2백여 기 이장비를 들여 쌍릉 발굴이 필요했을까? ‘무왕을 기리는 고유제‘ 외에도 시는 “쌍릉 가치를 재정립하고 백제왕도 익산 정체성 확립으로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추가등재에 대비한다.”고 밝혀 ’천도설과 무왕이나 선화공주릉‘을 뒷받침해 역사왜곡이 심히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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