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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선화공주 진평왕 셋째 딸인가?

  • 입력 2017.10.13 12:00
  • 수정 2017.10.1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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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후 좌평 사탁적덕의 딸’이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웠다.“, ’사리를 받들어 봉안했다.‘는 봉안기를 보자. 왕후 앞에 국호가 붙어 정실왕후를 나타낼 뿐 아니라 ’백제왕후‘와 장인 ’사탁적덕‘이 ’대왕폐하‘보다 먼저다. 왕후 중심 내용이다. 사탁(택)왕후가 발원자와 시주자 및 ’가람‘ 건립자와 사리봉안자다. 사탁왕후 서자로 추정되는 의자왕(641~660) 즉위 직후, ’일본서기‘ 642년에 ”’국주모國主母‘(나라 주인인 어머니)가 죽자 왕자 ’교기‘를 비롯 여동생과 관리 40여 명을 추방했다.“는 국주모가 사탁왕후다. 일본 시각에도 대왕 대신 국모(나라 어머니)보다 훨씬 강한 ’나라 주인’이다. 좌평 사탁적덕의 막강한 권력과 재력이 느껴진다. 일연 스님이 1280년 전후 집필했던 삼국유사 서동요 선화공주도 ‘봉안기’ 때문에 사탁왕후에 밀려났는데 여전히 서동축제에는 경주 선발 선화공주다. “‘역사도시’가 아니라 ‘설화도시‘인가?“

“사탁왕후=선화공주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금마 주민도 “사탁왕후로 정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삼국유사 “무왕과 부인이 사자사로 가던 중 미륵삼존이 출현해 부인이 ‘대가람大伽藍’을 세우기를 원해 세웠다.”는 내용과 봉안기 “재물을 희사해 ‘가람伽藍’을 세웠다.”는 기록에 모순이 없다. 서동은 사비(부여)에서 서동요를 퍼뜨리고 사탁왕후와 결혼한 것은 아닐지?

“‘무왕과 사탁왕후 미륵사 창건’이 확증됐는데도 ‘무왕과 선화공주 창건'에 ‘신앙 간증’과 비슷한 종교적 체험기인 관세음응험기를 근거로 '천도설과 백제왕도', ‘무왕의 왕궁조영造營'에다 일부 기록과 일제 보고서 및 무덤을 근거로 ‘무왕릉과 비릉’이라는 논문까지 남긴 인물이 쌍릉 재발굴이라니. 논문에는 일제 발굴유물과 능에 대한 분석까지 상세하다. ‘무왕로·선화로’라는 도로명까지 버젓한데 ‘무왕과 선화공주릉’이라 선언하지, 6억5천만원을 들여 발굴인가?

중국과 일본역사에 취급도 안 한 ‘관세음응험기’가 사료史料인가? 내용도 양 무제武帝 연호로 502~519년인 양梁 ‘천감天監‘과 ’백제무광왕武廣王천도(중략) 정관貞觀13년(639년)‘이 동시에 나와 최소 120년 차이다. 두 사람 영험기인가? 무광왕=(쌍릉)무강왕武康王=무왕武王인가?

이덕일과 이희근의 ’우리역사 수수께끼‘ 등 많은 저술에는 봉안기 전에 ”선화공주가 익산에 터전을 두었다.“고 밝혔다. 현재 부여와 익산은 웅포대교만 건너면 된다. ’익산’ 지명이 없을 때 미륵산과 부소산은 같은 백제 수도권이다. ‘익산 서동과 부여 사탁선화’일 개연성이 짙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재위 579~632)은 아들이 없이 두 딸을 두어 큰 딸 덕만은, 황룡사 9층탑을 착수했던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이고, 작은 딸은 천명으로 제29대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 ‘김춘추‘ 어머니다. 선화공주는 ‘삼국유사 무왕조’에 소개될 뿐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물론 왕과 왕후, 공주 및 화랑 우두머리인 풍월주 기록이 세밀한 김대문의 ‘화랑세기’도 기록이 없다. 삼국사기는 백제 동성왕 15년(493)이 신라 소지왕 때 신라귀족 이찬 ‘비지’의 딸과 결혼도 기록했는데 ’백제왕후‘ 셋째 딸만 기록이 없다니. 화랑세기에도 진평왕은 마야황후에 덕만과 천명공주만을 두었음을 기록했다.

지금도 경주 가기가 쉽지 않고, 사투리가 확연한데 적국에서 서동요를 유포시키고 왕후가 준 순금 한 말을 지닌 공주를 백제 땅까지 데리고 올 수 있을까? ‘산처럼 쌓인 황금’을 어찌 하룻밤에 신라궁궐에 보낸단 말인가? 사투리 차이도 없고 익산에서 하룻밤에 보낼 궁궐은 사비(부여) 외에 없다. 진평왕 인심을 얻어 왕으로 등극했다는데 무왕(600~641) 즉위 직후인 602년 신라 아막성(남원 아영)을 공격하는 등 10여 차례 전쟁 대부분 백제가 공격했을까?

‘봉안기 내용과 國主母‘는 선화공주가 동탑이나 중앙탑에 별도 봉안기를 남겼을 것이라는 주장과 모순된다. 사탁왕후와 선화공주가 각각 가람(미륵사)을 세웠다는 말인가? ‘가람’은 3탑3금당3원으로 이뤄진 미륵사 전체다. ‘진평왕 딸, 선화공주’ 외에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봉안기, 일본서기에 상호모순이 없다. 진평眞平과 좌평佐平도 흡사하다. ‘백제 사탁왕후=사탁선화’가 ‘신라 선화공주’로 둔갑한 것은 아닐지? “사탁왕후가 지하에서 통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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