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칼럼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선화공주 백제인일 가능성!

  • 입력 2017.10.16 16:16
  • 수정 2017.10.16 16:17
  • 댓글 0

[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사탁왕후와 선화공주를 별개 인물로 간주하며 봉안기와 사탁왕후를 애써 무시한다.” ‘신라 선화공주’를 수십 년간 주장했던 일부 사학계가 사리장엄 발견 후, 취한 공통점이다. 선화공주를 별개 인물로 남겨야 그간 주장이 허구가 되지 않기 때문일까?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성確證偏向性이라면 역사왜곡이다. 사탁왕후와 선화공주는 동일인일 가능성이 짙다. “선화공주가 백제인일 수 있다.”는 주장은 ‘봉안기’ 이전 상당수 학자가 제기한 바 있다.

고주몽 아들, 온조가 세운 백제는 한성(서울)백제(BC18~475)와 웅진(공주)백제(475~538) 및 사비(부여)백제(538~660)로 나뉜다. 백제 한성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당하자 문주왕(475~477)이 웅진으로 천도했다. 훗날 동성왕(479~501)은 백.사沙.연燕씨 등 웅진세력과 한성에서 온 귀족과 균형을 꾀하며 왕권강화에 전념했다. 특히 백제를 22개로 나누어 주로 왕족이 ‘담로장(분국왕分國王)’으로 통치하는 담로제를 확립했는데 '웅포 입점리고분'에서 왕족만이 사용한 금동제 장신구 출토에서도 확인된다. ‘공주’도 국왕의 딸만을 뜻하지 않아 사탁왕후를 결혼 전 선화공주로 칭했을 가능성이 짙다. 고구려 남하에 493년 신라 소지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이찬 ‘비지’의 딸과 결혼한 동성왕도 좌평 백가에 살해된다.

무령왕(501~523)이 백가를 토벌하고, 사비 천도는 성왕(523~554) 16년(538) 이뤄졌다. 사비를 전·후·상·중·하 오부五部로 나누었는데 사리장엄 금제소형판에는 '“중부 덕솔(16관등 중 4품) 지율이 금 한 덩어리를 보시한다.(中部德率支栗施金壹枚)”와, “하부 비치부와 부모처자가 함께 보시한다.(下部非致夫及父母妻子同布施)”는 명문이 있다. 중·하부 관리가 봉안에 참여했으며 부모처자와 함께 보시한 것으로 볼 때 익산이 사비 하부이거나 상부 및 전·후부는 먼 곳임을 추론할 수 있다. “서동요 주인공이 웅진시대 무령왕이다.”는 주장에 반박자료가 될 듯하다. 진흥왕과 연합한 성왕은 진흥왕에 553년 한강하류를 빼앗기자 아들 ‘여창’과 신라를 정벌하다 관산성(옥천)에서 전사한다. 여창이 즉위한 위덕왕(554~598) 시대가 지나고, 혜왕(598~599)과 법왕(599~600)을 거쳐 서동이 즉위한 30대 무왕(600~641) 시대다. 불과 2년여 만에 네 명의 국왕이 지배한다. 위덕왕이 아좌태자를 일본에 보낸 이듬해 동생 혜왕의 즉위나 혜왕과 법왕의 짧은 기간 사망은 왕권붕괴와 귀족암투 및 정변이 연상된다. 극도 혼란을 딛고 무왕 42년 통치는 신라 진평왕이 아닌 ‘엄청난 백제귀족의 확고한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삼국유사 외에 한국과 일본, 중국 사서에도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 결혼기록이 없는 것은 ‘망국이 된 백제 안의 결혼’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짙다. 사정재조립‘가람’捨淨財造立’伽藍‘(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도 선화공주와 사탁왕후가 동일인임을 내포한다. 삼국사기나 수서에는 법왕 아들이 무왕이라 했으나 삼국유사는 “무왕이 부인과 사자사로 가던 중 미륵삼존이 출현해 부인이 ‘대가람大伽藍‘을 창건하기를 원하니 왕이 허락해 미륵사를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이라 했으나 여기서는 혼자 사는 여자(獨女) 아들이라 전하니 알 수 없다.(未詳)“고 했다.

그러나 법왕 아들은 아닐 수 있다. 근년 중국에서 발견된 당나라에 끌려간 의자왕 태자, ’부여융扶餘隆’ 묘지명에 의자왕과 조부인 무왕은 나오나 통상 나오는 증조부 법왕 이름이 없는 것도 이를 대변한다. 서동 어머니도 미모가 출중해 왕과 사이에 낳은 서동 목숨을 부지하러 부여 외곽에 숨어 살며 ‘마’를 캐 연명하다 서동이 미염무쌍 ‘사탁선화’를 차지하기 위해 사비에서 서동요를 유포시킨 것은 아닐지? ‘배후세력 지원과 신분적 변화’를 의미하는 ‘흙처럼 쌓인 황금’을 사비 좌평 사탁적덕에 보내고 사탁선화와 결혼해 사탁가문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닐지? 봉안기 ‘가람’과 삼국유사 ‘대가람‘은 일치하고 진평眞平과 좌평佐平은 한문과 발음도 비슷하다. 백제군 4만 명이 몰살한 즉위 직후, 신라와 아막성(남원 운봉)전투(602)는 왕권이 붕괴될 패배인데도 끄떡없다. 사비궁 중수, 부여 왕흥사, 궁남지, 미륵사, 제석사 등을 세우려면 현재도 조兆 단위 재력가만이 가능하다. 사탁적덕이 강력 후원세력임이 연상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놓치면 후회할 이시각 핫이슈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