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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익산천도(금마백제)와 관세음응험기

  • 입력 2017.10.23 16:50
  • 수정 2017.10.23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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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정사正史는 한성백제와 웅진(공주)백제, 사비(부여)백제(538~660)만 인정한다. 일부에서 무왕(600~641)의 ‘익산천도’를 주장한다. ‘백제왕도‘라며 ’마한왕도’는 사라져 역사후퇴다. ‘신라 선화공주’는 삼국유사라도 기록이 있으나 ‘익산천도’는 한중일 사서에 전혀 없다. ‘관세음응험기’ 등이 ‘금마백제‘ 근거다.

삼국사기에 “602년 ‘(무)왕‘이 출병시켜 신라 아막성을 포위했다. 신라왕 ‘진평‘이 기병 수천 명을 보내 불리해 돌아왔다. 신라가 침범해 왕이 좌평 해수에 4만 명으로 싸우게 했으나 해수 혼자 돌아왔다.”고 기록됐다. 즉위 직후 4만 명이 몰살해 왕권몰락이 우려되나 끄떡없다. 사탁가문이 전쟁을 주도했고 사위인 무왕을 적극 후원했다. “630년 2월 사비궁을 수리하고 왕은 웅진으로 갔다. 가물어 공사를 중지하고 왕이 7월 웅진에서 돌아왔다. 634년 2월, (부여) 왕흥사가 준공됐다. 3월, 대궐 남쪽 못(궁남지)을 파 물을 끌어들여 가운데 섬을 쌓았다. 636년, 왕이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대왕포大王浦다. 638년, 왕이 큰 못(궁남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 641년 3월 왕이 사망했다. 시호를 ’무武’라 했다.“고 기록됐다. 무수한 전투 중에 사비궁 수리도 힘든데 왕흥사, 궁남지, 미륵사 창건, 두 번 세운 제석사 외에 왕궁성까지 조영造營(세워 경영함)해 천도 했다니? 신라와 13번 전투 중 11번을 백제가 공격했고, 4만명 몰살도 명백해 ‘진평과 무왕은 ’옹서‘도 아니고 ‘천도‘ 기록도 없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660년에 “계백이 전사하자 도성(사비)을 에워싸니 (7월 13일) 의자는 밤에 도망해 웅진으로 피난하고 아들, 융은 대좌평 천복天福 등과 항복했다. (18일) 의자가 태자 등을 데리고 웅진에서 나와 항복했다.” 무왕과 의자왕도 공주로 갔다. 천도했다면 완벽했을 왕궁이 아닌 공주로 갔을까? 특히 한성·웅진·사비는 ‘한강과 금강’으로 방어에 매우 유리한데 수비가 극히 어려운 비산비야 왕궁성을 세워 천도했다는 말인가? 신라와 전쟁·방어 전초기지로나 활용하려 이전부터 있던 왕궁성을 크게 중수했을 정도로 추정된다.

‘익산천도’ 근거도 황당한 육조고일의 ‘관세음응험기‘가 활용된다. 김명환(84) 향토사학자는 “서울 모 대학 H교수가 도내 모 대학에 관계할 때 공개했으며 천도설은 마백연구소 학술지 등에 발표한 일본학자 마끼다 다이로 교수 연구서(1970)가 기초됐다.”는 것이다. 한중일 사서에 없거나 무왕 때 사비궁이 명백한데 최초 발견자와 공개자가 이 대학과 관계된 인물들로 ‘역사조작’이라고 비판한다. 응험기 내용도 ‘조작설’에 기름을 붓는다. 첫 13줄은 양무제 연호로 502~519년인 양梁 ‘천감天監‘인데 뒤 5줄은 당태종 연호인 '정관貞觀13년(639년)‘이 동시에 나와 최소 120년 차다. 두 사람 응험기인지, 첫 내용을 쓴 사람 예언인지? 1965년 왕궁리석탑에서 사리장엄이 나왔고, 사리장엄이 봉안됐음을 알게 하는 제석사 심초석이 폐사터에 남았으며, 통상 사찰은 화재로 폐사될 뿐 아니라 제석사가 화재로 사라졌다는 구전이 공공연해 ’백제무광왕 천도 지모밀지(금마)' 외에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는 점도 ‘조작설’이 나도는 이유다. 종교나 무속 등에는 기이기적奇異奇蹟, 초능력이 수반된다. ‘성령으로 잉태’, ’오병이어五餠二魚’나 “목에서 흰 젖(피)이 솟았다.”는 ‘이차돈 순교’, “지명법사가 하룻밤에 신라궁궐에 금을 보냈다”는 것은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다. 불교체험기인 응험기도 “법사를 청해 참회하니 없던 사리가 보였다”는 등 관음보살 영험함을 강조한 남북조 이후 유행했던 무수한 응험기 중 하나다. ‘중국 관음보살상 연구‘ 저자인 강희정은 “중국 관음신앙 정착과 유행을 짐작케 해주는 ’위경僞經‘들이다.”고 설파했다. 인도 전래 불전이 아닌 ’거짓 경전’이라는 의미다. 특히 “639년 11월 불탔는데 대왕의 신심이 독실해져 다시 절을 지어 보관했다.”고 단정했다. 불탄 지 1년 4개월 후인 641년 3월 무왕이 사망했는데 당시 국력으로 그 사이 절을 다시 지어 보관했다는데 믿을 수 있는가? 육하원칙에 따라 응험기 ‘실물 전면 공개검증’으로 뒷부분 ‘추가 첨부설‘을 해명해야 한다. 역사는 설화도, 돈 벌기 위한 수단도 아니며 ’정확성‘이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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