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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폭풍 속의 고아들 / 리산

  • 입력 2018.02.26 15:44
  • 수정 2018.02.2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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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속의 고아들 

- 리산

 

불은 흙 속으로 잠기고 흙은 물 속으로 잠기고
물은 공기 속으로 공기는 의식 속으로 잠기고

버티재를 지날 때면 네 생각이 날 것이다

희게 흐드러진 철쭉꽃 덤불마다 너는 있다
고단한 이마를 기대며 가는 퇴근길 버스 유리창 너머
어두운 제단 저녁이면 내리는 빗속에
무심히 자라는 어린 풀들 끌려나온 마음 속에
낡은 모자 긴 여행으로 함께 나이가 든 산책의 장소들마다

작별을 위한 재와 먼지의 음악이 끝나면
붉은 벼랑 끝으로 깊은 잠은 오나
높은 창 안쪽에서 들려오는 죽은 누이를 위한 자장가
먼 바다를 지나는 무연고자들의 불빛
번지는 봄날 황혼에도 네가 울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건
어디선가 내가 대신 울어주었기 때문이지

눈물을 뿌리며 잃어버린 누이
긴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누가 먼 하늘을 날아 간다

 
              

 살아온 날들을 글로 쓰면 소설책 열 권은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노인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누구나 폭풍처럼 격정적인 시간을 지나 나이를 먹습니다. 우리를 격정에 휩싸이게 했던 그 감정들은 서서히 가라앉았다가 예고 없이 마음의 표면으로 떠올라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때로는 퇴근길 유리창에 고단한 이마를 기댔다가, 때로는 비 내리는 날 무심코 어두운 저편을 보다가, 혹은 길가에 돋아난 어린 풀잎을 보다가, 우리는 오래 묵은 기억의 파편들이 할퀴고 간 자리를 만지며 아파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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