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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여름의 잔향 / 김해준

  • 입력 2018.04.03 13:59
  • 수정 2018.04.0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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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잔향 

  - 김해준

 

    돼지를 묻은 매몰지 주변부터 흰 꽃이 피어나더니, 음지마다 곰팡이가 슬어 마을에 기침병이 돌았다. 턱을 당기고 미리 바닥을 훑던 영리한 돼지 무리는 진즉에 우리를 부숴 산으로 들어갔고 불그스름한 고적운이 하늘을 덮는 날이면 알 수 없는 짐승 울음에 동네 개들이 산발적으로 짖었다. 동산에 풀어뒀던 염소 몇 마리의 내장이 다 파 먹히고 나서야, 읍장은 경보를 내고 은퇴한 포수를 불렀다. 얼마 후, 기름칠한 엽총을 옆구리에 차고 초록색 장화를 신은 노인과 숨 쉴 때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잡종견 서너 마리가 산속으로 들어갔다.
 

     오뉴월에 서릿발이 내린 듯 땅의 갈라진 틈으로 올라온 검붉은 액체가 증발하여, 무릎 밑으로 얕은안개가 꼈다. 어금니가 길게 자란 돼지가 땅을 헤집고 등을 비빈 흔적을 따라 개들은 발정 난 성기를 세우고 서로 엉킨 목줄을 풀 겨를도 없이 노인을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갔다. 작은 올가미에 걸린 토끼나 장끼, 다람쥐나 까마귀 같은 짐승들이 돼지의 흔적을 따라 천천히 썩어가고 있었다. 바람도 닿지 않는 산의 중턱까지, 길 없이 묵뫼 몇 장 놓여있는 벼랑 밑에 콧등으로 잠자리를 파던 돼지는 죽어 있었다. 살가죽에 흰 곰팡이 갓 털을 촘촘히 박고 몸뚱이가 부풀어 올라 터지기 직전이었다.
 

    개들은 꼬랑지를 말고 오줌을 지렸고 노인은 합장을 하고는 언덕을 넘어 다시는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봄이 와서 땅이 녹으면 산 채로 땅에 묻힌 생명들이 쓰러진 자리부터 꽃으로 뒤덮입니다. 구제역이 쓸고 간 자리는 무수한 죽음을 품고 있는 자리입니다. 인간의 먹이로 태어나 인간의 먹이로 죽기 위해 잠시 이 세상에 머무는 생명들……, 살아서는 이름도 자유도 없이 오물 위를 뒹굴다 병에 걸리자 땅속에 산 채로 묻혔습니다. 누군가 한을 품으면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합니다. 검붉은 썩은 핏물이 온 산을 병들게 하고 이내 인간의 마을까지 들이닥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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