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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악기 / 홍일표

  • 입력 2018.04.10 12:30
  • 수정 2018.04.10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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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

- 홍일표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빈 그릇에 담긴 것은 다 식은 아침이거나 곰팡이 핀 제삿밥이었다 콜로세움의 노인도 피렌체의 돌계단 아래 핀 히아신스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은 유적의 차가운 발등에 남은 손자국만큼 허허로운 일이나 한 번의 키스는 신화로 남아 몇 개의 문장으로 태어났다 불꽃의 서사는 오래가지 않아서 가파른 언덕을 삼킨 저녁의 등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 지상의 꽃들은 숨쉬지 않았다 눈길을 주고받는 사이 골목은 저물고 나는 입 밖의 모든 입을 봉인하였다 여섯시는 자라지 않고 서쪽은 발굴되지 않았다 삽 끝에 부딪는 햇살들이 비명처럼 날카로워졌다 흙과 돌 틈에서 뼈 같은 울음이 비어져나왔다 오래전 죽은 악기였다 음악을 놓친 울림통 안에서 검은 밤이 쏟아져나왔다 나는 다만 노래를 가지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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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에서 악기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악기 속에는 음악 대신 흙이 담겨있습니다. 소리는 사라지고 소리를 담았던 그릇만 남았습니다. 악기가 노래했던 찬란한 아침 풍경도 돌계단 아래 히아신스도 만날 수 없습니다. 피가 통하는 살점인 음악은 다 썩고 악기라는 뼈만 앙상하게 남듯, 기쁨과 슬픔을 담았던 우리네 한 생도 언젠가는 빈 뼈만 남을 것입니다. 악기에게서 노래를 가져갔던 시간이 언젠가 우리네 불꽃같던 한 생의 서사를 가지러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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