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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리아스식 해안의 검은 겨울 / 강인한

  • 입력 2018.05.02 13:28
  • 수정 2018.05.02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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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스식 해안의 검은 겨울 

- 강인한

 

   지난밤 그 여자의 하얀 레이스 달린 파란 실크 잠옷 그림자가 오래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침실 창문에 검정나비 실루엣으로 하늘거리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피폐해진 주민들의 안녕 위로 사금파리가 싸락눈처럼 한 줄 두 줄 아프게 흩날리는 그 시간. 잿빛 어두운 마음의 문을 열고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내 차가운 손을 잡아주셔요, 그리고 내게 당신의 피를 넣어주시면 당신을 주인으로 섬길게요. 붉은 가방을 손에 들고 여자가 자신에게 날아온 동박새를 도끼눈으로 내쫓으며 말했다. 저리 가, 가버려. 가방의 아가리는 이를 악물고 닫혔으나 벌어진 지퍼의 잇바디 사이로 보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독한 연기는 뱀의 혀처럼 갈라져 주민들의 한두 가닥 가냘픈 희망을 단숨에 빨아들였다.

 

    리아스식 해안 가까운 바다에서는 날마다 빈사의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허옇게 배를 내밀고 떠올랐다. 안간힘을 써서 검은 수면 위로 뛰어올라 그 여자가 손짓을 하면 물고기들은 가끔씩 날개 달린 뱀처럼 날았다. 죽은 아버지의 망령도 그 틈에 끼어 선글라스를 쓰고 날아올랐다. 신화 속에서 끄집어 낸 시간의 비늘들은 단단한 쇠줄로 꼬여 그 여자의 믿음직한 허리띠가 되었다. 그 여자를 에워싼 제국의 부로들이 구세주를 대하듯 엄숙히 가스통을 어깨에 메고 나서는 아침, 그들의 빨간 내복에 여자가 손키스를 뿌리자 제국의 겨울은 일제히 바닷가 검은 바위를 향해 달려갔다. 강철같이 뭉쳐진 제국의 겨울은 불타는 돌멩이가 되어 가망 없는 미래에 연합하기 위하여 허공을 날아갔다.

 

    장난감 공룡을 손에 든 채 태어난 차세대의 아이들은 엉덩이에 벗을 수 없는 형극을 문신으로 두르고 불온한 소문의 식물로 성장했다. 그 밤에 저주 받고 태어난 아이들은 아홉 개 꼬리를 가진 붉은 여우의 울음을 좇아 몽골의 사막으로 떠나갔다고도 하며 일부는 페리호를 타고 후쿠시마로 떠났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돌려줘, 내 피를 돌려줘. 여자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다가 죽은 아이들은 타다 남은 약속의 숲에서 흰 숯으로 발견되었다. 번쩍번쩍 손을 들어 번개를 내리칠 때마다 그 여자의 증오심은 청동 지붕에서 유황연기를 피워 올렸고, 깊은 새벽이면 행복한 신음을 흘리며 핏발 선 눈이 항상 지상을 두리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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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권좌에 오른 공주님이 있었습니다. 사금파리가 싸락눈처럼 내려 백성들은 고통에 시달렸지만 푸른 실크 잠옷을 입은 공주님은 침실을 벗어날 줄 몰랐습니다. 어느 날, 동박새가 붉은 가방에 급한 소식을 담아 공주님을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동박새는 도끼눈을 뜬 공주님에게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의 가냘픈 희망마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날 이후 리아스식 해안 가까운 바다에서는 날마다 빈사의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허옇게 배를 내밀며 떠올랐습니다. 불온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지만 가스통을 멘 원로들의 나서서 공주님을 비호해주었습니다. 공주님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다 죽은 아이들의 타다 남은 약속은 깊이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공주님을 향한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차가워졌습니다. 백성들은 온 나라를 얼어붙게 만든 추운 겨울이 어서 끝나기만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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