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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읽는 아침] 하직 / 김이듬

  • 입력 2018.07.26 14:01
  • 수정 2018.07.26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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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직 

- 김이듬

 

새를 키웠다 아주 어렸을 때 숲 속에 버려졌을 때 그 새가 내 손등 위에 앉았다 처음엔 물방울인 줄 알았다

그 새는 아주 작고 어렸다 사람들은 가만히 관찰하다가 매 새끼인지 독수리 새끼인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나는 신경 쓰지 않는 척했다

스물한 살이 지났고 작별 인사를 하고도 무엇인지 모른다

새장 대신에 실을 매달아놓고 나는 끼적거렸고 새는 꾸룩거렸다 나는 새에게 자신을 모방하거나 비밀을 말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살구나무는 자랐고 나는 실을 매달아놓은 그 나무와 새의 희박한 다리 사이에서 갈등했다 어제는 새가 손등 위에서 내 손을 쪼았고 흰 눈 위에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나는 가만히 있었다

나는 새를 버린 적 있는데 그날 이삿짐 짐차 위를 날아와서 꽃삽처럼 내 심장을 아프게 했다 그는 내게 너무 많이 쓰지 말라고 했다

내 가슴에서 모든 꽃은 졌고 아주 어리고 키가 큰 살구나무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어리지만 태양만큼 커다랗고 노란 살구들이 달려있다

그사이 내 동생은 죽었고 운명이 바뀐다고 하여 이름을 철주에서 승주로 바꾼 후에도 앓다가 떠난 후에도 그는 노래한다 실에 매달린 새처럼 살구나무 가지 사이에서

펜이나 종이에 긁힌 건데 흘러넘치는 새소리가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가지에 매달려 있다가 새벽에 나가보면 떨어져 깨져 있는 살구들 나는 요맘때마다 병을 앓고 더 이상 꺼내놓으면 안 되는데 한여름의 수십 개의 태양 아래 숨을 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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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고 어린 새’를 닮은 동생을 두었었나 봅니다. 그는 ‘커다랗고 노란 살구’같은 종양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가 세상을 ‘하직’했나 봅니다. ‘이름을 승주에서 철주로 바꾸’었는데도 결국 병을 이기지 못했나 봅니다. 그 때문에 화자의 ‘가슴에서 모든 꽃’이 졌나 봅니다. 글을 쓸 때마다 마치 ‘새소리’처럼 사각사각 그 목소리가 들린다는 걸 보니, 동생이 달고 떠난 살구들이 점점 커져 ‘수 십 개의 태양’이 되어 화자를 환하게 비추고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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