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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진은영의 ‘있다’

있다 

- 진은영

 

창백한 달빛에 네가 나의 여윈 팔과 다리를 만져보고 있다

밤이 목초 향기의 커튼을 살짝 들치고 엿보고 있다

달빛 아래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빨간 손전등 두개의 빛이

가위처럼 회청색 하늘을 자르고 있다

 

창 전면에 롤스크린이 쳐진 정오의 방처럼

책의 몇 줄이 환해질 때가 있다

창밖을 지나가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여기에 네가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가 있다

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나무 노란 꽃가루가 있다

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이 있다

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깨진 나팔의 비명처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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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살다보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습니다. 목초향기가 낮게 깔리는 밤이 있고, 그 밤에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고, 청회색 하늘 아래 붉은 손전등을 들고 나를 데리고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책을 읽는 창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를 기억하는 밤이 있고, 죽은 가지 위에서 밤새 우는 새들이 있습니다. 그 울음소리에 온몸을 떨며 잠 못 드는 그런 날이 있습니다.

 

최형심 시인  ir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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