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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정진규의 ‘숲의 알몸들’

  • 입력 2018.11.27 12:24
  • 수정 2018.11.27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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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알몸들 / 정진규

 

올해는 대설주의보가 잦았다 회사후소(繪事後素)*로 한 밤내 눈 내린 아침 화계사 청솔숲 작은 암자 한 채로 기울고 있었다 눈빛 흰빛의 음덕이었다 직립이란 없다 서로를 버티게 해주는 이쪽저쪽의 힘을, 사방 기울기를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내린 눈들의 무게와 흰빛들의 비유가 숲의 알몸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주었기 때문이다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로 건너뛰는 청설모의 속도마저 한눈에 가늠할 수 있었다 나무들의 사이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건드리면 쨍 소리를 낼 듯 공기들의 살얼음이 팽팽했다 이쪽 청솔이 오른쪽으로 기운 만큼 그만큼만 저쪽 청솔이 왼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런 사방 기울기의 연속 무늬를 보았다 오늘 아침은 눈들이 담아 온 하늘 무게만큼 조금씩 더 기울고들 있었다 슬픔의 중량이 어제 오늘 더해졌다 하나

 

* 회사후소 : 그림 그리는 일은 그 바탕이 희게 극복된 다음이라야 한다는 뜻의 《논어》일구(一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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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첫눈치고는 꽤 많은 양의 눈이 오는 바람에 순식간에 세상이 흰 도화지처럼 변해버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밤새 숲속에 눈이 내리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뛰는 청설모의 속도, 건드리면 쨍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맑은 공기, 한쪽으로 기울어진 소나무의 푸른 가지, 눈 덮인 소나무 가지 위로 내려앉는 청설모의 기울기……. 눈(雪)은 그동안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하는 눈(目)을 갖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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