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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미륵사석탑 사리장엄과 삼국유사前

  • 입력 2019.01.14 15:48
  • 수정 2019.01.1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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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신라진평왕眞平王 딸, 선화공주와 백제좌평佐平 사탁적덕 딸, 사택왕후를 알기 위해 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과 일연스님 삼국유사 중 서동설화를 요약·비교하자.

(삼국유사 서동설화)를 쉽게 쓰자. 『백제무왕 이름은 장璋이다. 어머니가 과부로 서울남쪽 못 가에 살다가 못의 용과 통해 낳았는데 어릴 때 서동으로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마薯를 캐 생활해 서동薯童으로 불리었다. 신라 진평왕 셋째공주 선화善花·善化가 아름답기 비할 데가 없다(미염무쌍美艶無雙)는 말을 듣고 서울로 가 아이에 마를 주고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 가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잔다."는 노래를 부르게 하니 대궐까지 퍼졌다. 백관이 간해 공주는 귀양을 가니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었다. 도중에 서동이 함께 가겠다고 하자 공주는 믿고 정을 통했다. 백제로 와 모친이 준 황금을 놓고 "백년 부를 누릴 수 있소."라고 하자 서동은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땅에 흙더미처럼 쌓였소."라고 했다. 공주는 놀라 "천하보물이니 부모가 계신 대궐로 보내면 좋지 않겠소."라고 하자 서동이 응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금을 사자사 지명법사에 금을 (경주에) 보낼 계책을 물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라."라고 했다. 하룻밤에 신라궁중에 보내자 진평왕은 신통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해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이로 인해 서동은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 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나자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 "이곳에 ‘큰 절(대가람大伽藍)‘을 세워 주십시오."라고 하자 왕이 허락했다. 지명법사가 하룻밤 새 산을 헐어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미륵삼존 상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과 낭무를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했다. 진평왕이 많은 장인百工을 보내 도왔는데 오늘에까지 절이 있다. 법왕의 아들이라 했으나 여기서는 과부獨女 아들이라 하니 자세히 알 수 없다.』고 기록됐다.

(사리장엄 핵심내용)을 보자. 百濟王后佐平沙積德女(백제왕후는 좌평 사탁적덕의 딸)과 能謹捨淨財造立‘伽藍’以己亥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능히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가람(미륵사)를 만들어 세우시고, 기해년(639) 1월29일 사리를 봉영했다.), 大王陛下年壽與山岳齊固(대왕폐하 수명은 산악처럼 견고하고)라고 기록됐다.

일연스님은 사료를 엄청 챙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삼국유사 집필 때인 1279-81년께는 639년 사리장엄 봉안 후 640년가량 지난 세월이다.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말 충렬왕 재위기다. 무수한 전란 후 사료가 극히 적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등 한중일 사서에 기록이 없으니 입에서 전해오는 구전을 기록했다. 고속도로가 사통팔달인 현재도 익산에서 경주는 2백여 km다. 당시 오솔길이나 산길, 들판을 지그재그로 서동과 선화공주가 익산에 오려면 이의 수 배 거리를 돌았을 것이다. 국경의 무수한 성곽과 병사를 피해 백제로 금 한말을 갖고 올 수 있을까? 지금도 사투리가 확연해 아이에 서동요를 유포시키자마자 첩자로 발고돼 처형당했을 것이다. 사택왕후 명문이 나오자 선화공주를 별개 인물로 간주하고 중앙탑과 동탑 발원은 신라 선화공주가 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그렇다. 미륵사가 신라진평(선화공주)과 백제좌평(사택왕후) 합작품이란 말인가? 국립(왕립)사찰에 무왕과 즉위 전, 태자였던 의자왕은 어디로 갔는가? 중앙목탑은 무왕, 동탑은 태자가 발원했을 개연성이 짙다.

왕후 앞에 국호가 붙어 ‘백제왕후‘다. 무왕도 ’대왕폐하‘다. 신라 선화공주가 별개 인물이고 사택왕후가 후궁이라면 감히 백제왕후라니. 조립석탑造立石塔을 넘어 “미륵사를 만들어 세웠다.”는 조립가람造立伽藍이다. 사택왕후는 단순 서탑西塔 발원 및 사리장엄 봉안자가 아니다. 특히 사리장엄 ’가람伽藍‘과 삼국유사 ’대가람大伽藍‘은 大자만 없을 뿐 똑같다. 얼마나 돈이 많기에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가람(미륵사)을 세웠다.”고 했을까? 무왕 시절 신라와 전쟁을 하며 미륵사와 제석사를 세우고 왕궁성을 개·보수하거나 사비궁 중수, 부여 왕흥사, 궁남지 등을 조성할 수 있었을까? 백제좌평佐平과 신라진평眞平은 한문은 물론 발음도 유사하다. 위덕왕(재위 554-598) 사망 후 아좌태자가 아닌 동생 혜왕(598-99) 즉위에 이어 법왕( 599-600), 무왕(600-641)이다. 2년 만에 네 명 왕이다. 왕권붕괴와 귀족암투 및 정변이 연상되는 혼란기와 신라와 전쟁, 미륵사 건립 등 막대한 재정출혈을 딛고 무왕 40여 년 통치는 백제귀족의 확고한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국왕을 바꿔 치울만한 막강한 좌평 사탁적덕이 아니면 해석이 안 된다. 즉위 직후인 602년 좌평 해수 장군이 이끈 백제군사 4만 명이 몰살한 아막성 전투에도 무왕 왕권유지도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당시 4만 명은 지금 40만 명 몰살보다 크다. 이런 상황에 선화공주가 백제왕궁에 있었다니 전혀 믿을 수 없다.

삼국유사와 사리장엄은 한 가지만 빼고 모두 일치한다. 신라 선화공주 대신 사택왕후를 그 자리에 삽입시키고 ‘경주’ 대신 사택적덕이 머물렀을 ‘부여(사비)’를 대입하면 삼국사기 등 사서에 선화공주와 서동 결혼기록이 없는 것과 삼국유사 기록, 사리장엄에 상호모순이 전혀 없다. 선화공주=사택왕후, 사택선화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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