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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미륵사석탑 사리장엄과 삼국유사後

  • 입력 2019.01.15 15:31
  • 수정 2019.01.15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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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민족신화나 구전설화, 종교·무속, 영웅담에는 기이기적奇異奇蹟, 초능력 내용이 많다. 『하느님인 환인의 서자,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에 신시神市를 열고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곡식·수명·질병·형벌 등 사람의 360여 가지를 주관했다. 환웅은 곰과 호랑이에 쑥과 마늘을 주며 “이것을 먹고 백일 간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해 곰은 21일 만에 ‘웅녀’가 돼 환웅과 결혼해 단군왕검을 낳았다.』는 것이 단군신화다. ‘성령으로 잉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였다는 ’오병이어五餠二魚’나 “목에서 흰 젖(피)이 솟고,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진동하더니 꽃비가 내렸다.”는 ‘이차돈 순교’, “지명법사가 하룻밤에 신라궁궐에 금을 보냈다.”는 것 등은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다. "특정종교를 신성시하거나 선교(포교) 방편, 종교적 능력 및 신심 확대포장에 악용되거나 신앙에 몰입했을 때 허상·착각도 많다.

(삼국유사 서동설화)도 같다. 『과부가 못의 용과 통해 서동을 낳았다. 금을 지명법사가 하룻밤에 신라궁중에 보냈다.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났다. 지명법사가 하룻밤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웠다.』는 내용도 비현실적이다. 익산에서 하룻밤에 보낼 궁궐은 백제 사비(부여)밖에 없다. 신라와 13번 전투 중 11번을 백제가 공격했고, 무왕(재위 600-641) 즉위 직후인 602년 남원 아막성 전투에서 신라 진평眞平 군사에 의해 백제군 4만 명이 몰살했는데 무왕은 진평의 딸, 선화공주와 궁궐에서 사랑을 속삭이며 민심을 다독이고 왕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진평과 무왕'은 ’옹서翁婿(장인과 사위)‘도 아니고 익산으로 천도 기록도 없다. 무왕이 사비에서 유흥 등을 즐기며 머물렀던 무수한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오며 삼국사기 신라본기 660년에 『계백이 전사하자 도성(사비)을 에워싸니 (7월13일) 의자는 웅진성(공주)으로 피난하고 의자왕 아들, 부여융은 대좌평(사택 )천복天福 등과 항복했다.』고 기록됐다. 백제멸망이 부여·공주에서 이뤄졌고 당시 수도는 사비가 명백해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면 무왕이나 의자왕이 사비로 재천도 했다는 말인데 한중일 사서 어디에도 기록이 없다. 서동은 현재 익산에서 살고, 사택왕후는 좌평 사탁적덕의 딸로 부여에 살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사리장엄)을 보자. 百濟王后佐平沙乇積德女(백제왕후는 좌평 사탁적덕의 딸)과 能謹捨淨財造立‘伽藍’(능히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가람(미륵사)를 만들어 세우시고.)라고 기록됐다. 당시 내노라하는 문장가가 지었을 봉영(안)기는 온통 사택왕후 중심이다. 무왕은 2년 후 사망해 봉안 당시 와병으로 미륵사에 오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種善因於曠劫受勝報於今生撫育萬民(지극히 오랜 세월 선함을 베푼 인연으로 응보를 받아 금생에 만민을 어루만지는), 願使世世供養劫劫無盡用(오래도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기를 원하옵나이다.), 此善根仰資大王陛下年壽與山岳齊固(이 선한 근원과 자양분으로 하여 대왕폐하 수명은 산악처럼 견고하고) 내용도 왕후가 만민을 어루만지는 존재다. 오랜 공양과 선함을 자양분으로 무왕 수명이 산악처럼 견고하기를 원했다. 우원왕후즉신심동수경조법계又願王侯卽身心同水鏡照法界(또 왕후가 현세에 부처가 되어 마음이 물거울처럼 불법세계를 비추기를 원하옵나이다.)는 엄청나다. 삼국시대 ‘왕즉불王卽佛(왕이 곧 부처)’ 사상을 넘어 왕후가 즉신성불卽身成佛(현세 육신 그대로 부처가 되는 일)하기를 간구했다. ‘살아있는 부처’로 만민을 어루만지고 불법세계도 환히 비추기를 원했다. 신라 선화공주가 별도로 있고 사택왕후가 후궁이었다면 있을 수 없다.

서동은 경주가 아니라 사비(부여)를 간 것으로 추론된다. 왕을 폐위시키거나 옹립할 수 있는 막강한 좌평佐平 사택적덕 셋째 딸이 ”둘도 없이 아름답다.(미염무쌍美艶無雙)“는 말을 듣고 사투리도 같고 하루 이틀이면 오갈 부여로 가 서동요를 유포시키고 익산으로 데려온 것이 아닐까? 장인 사택적덕 조력으로 왕위에 올라 사자암으로 가다가 대가람(큰 절)을 세워달라는 사택선화 말에 따라 미륵사를 세우자 사택가문에서 막대한 재물을 희사한 것으로 사료된다. 즉위 3년, 4만 명이 몰살한 아막성 전투에도 왕위를 이어간 것은 무왕과 사택왕후의 지극한 사랑과 장인의 강력한 후원 때문이다. 봉영기에도 부처 힘을 빌어 무왕 건강이 산악처럼 견고하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사랑이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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