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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백제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딸은?

  • 입력 2019.01.17 14:34
  • 수정 2019.01.17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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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百濟王后佐平舍乇積德女(백제왕후좌평 사탁적덕 딸). 2009년 1월 14일 사리장엄 봉영(안)기를 통해 홀연히 나타난 사택(탁)왕후는 누구일까? 올해 기해년 3월12일은 무슨 날일까? 사택왕후가 왕족·귀족, 백성들이 운집해 사리장엄을 봉안한 기해년인 639년 음력 1월29일을 양력으로 계산하니 3월12일이다. 이날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준공식과 불교법회가 열린다.

백제좌평은 16관등 제1품 최고관리다. 사택가문은 백제 8대 대성 으뜸으로 대좌평과 좌평 등 수많은 인물 기록이 있다. 왕후에 ‘백제‘ 국호가 붙어 정실왕후임을 반증한다. 능근사정재조립가람能謹捨淨財造立‘伽藍’(능히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가람=미륵사를 만들어 세우시고)는 단순 석탑 발원·봉안자가 아닌 3탑·3금당·3원 사찰인 미륵사 최대 시주 및 건립 주체다. 사택왕후가 남긴 지정문화재는 국보11호 미륵사지西석탑에다 사리장엄 중 금제사리내호와 금동제사리외호, 금제사리봉영기, 구슬 등 공양품이 담겼던 6개 청동합 등 총 3건 9점이 2018년 보물 1991호로 지정됐다. ‘총통’ 가짜 국보사건 여파로 국보지정이 까다로워져 보물지정 후, 3-5년 후, 사리내·외호와 봉영기 등 국보 2-3개가 추가되고 금동합이 보물로 유력해 사택왕후는 국보 3-4개와 보물 등을 남긴 셈이다. 당시 유물은 아니나 사택왕후가 ‘만들어 세운’ 미륵사 유물은 보물 1753호 통일신라 금동향로와 보물 236호 미륵사지 당간지주 등이 있다.

봉영기에서 사택왕후는 種善因於曠劫受勝報於今生撫育萬民(지극히 오랜 세월 선함을 베푼 인연으로 훌륭한 응보를 받아 금생에 만민을 어루만지고 보살펴 기르는), 此善根仰資大王陛下年壽與山岳齊固(이 같은 선한 근원과 자량으로 ‘대왕폐하=무왕’ 수명은 산악처럼 견고하고)라고 간구했다. ‘착할 선善‘이 연속 나와 선화공주가 연상된다. 선과 덕을 쌓는 적선積善·적덕積德이다. 무왕에 대한 간절한 지극정성 사랑도 읽혀진다.

원왕후즉신심동수경조법계願王侯卽身心同水鏡照法界(왕후가 현세에 부처가 돼 마음이 물거울처럼 불법세계를 비추기를 원합니다)는 엄청나다. 삼국시대 ‘왕즉불王卽佛(왕이 곧 부처)’ 사상을 넘어 왕후가 즉신성불卽身成佛(현세 육신 그대로 부처가 되는 일)하기를 간구했다. ‘살아있는 부처=생불生佛’이 돼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고 불법세계도 환히 비추기를 원했다. 즉신성불 대상이 여성은 사택왕후가 최초다. ‘한국여성사’가 다시 쓰여 질 대목이다. 上弘正法下化蒼生(위로 정법을 넓히고 아래로 ‘창생=세상 모든 사람‘을 교화시키게 하소서)와 凡是有心俱成佛道(모든 중생도 함께 부처 가르침을 이루게 하소서)는 만민구제 대승불교 사상이다.

일연스님 ‘삼국유사’의 “무왕과 부인이 ‘용화산=미륵산’ 사자사로 가던 중 미륵삼존이 출현해 부인이 ‘대가람大伽藍’을 세우기를 원해 미륵사를 세웠다.”는 내용과 사택왕후가 발원·봉안 및 미륵사 최대 시주 및 건립자로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만들어 세운 ’가람伽藍‘”이란 ’사리장엄 봉영기’가 일치한다. 서동설화 중 신라 선화공주, 명문의 역사인 백제 사택왕후는 별개 인물이 아니다. 사택선화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봉영 640년이 흘러 고려 말 쓰여 진 삼국유사다. 좌평佐平 사택적덕 딸이 삼국유사에 신라왕 진평眞平 셋째 딸로 둔갑이 유력시된다.

2년 만에 4명(위덕왕·혜왕·법왕·무왕)이 바뀌는 극도 혼란기에 서동과 사택선화 사랑이 사비(부여)의 좌평 사택적덕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고 엄청난 재정지원과 많은 장인까지 보내줘 미륵사를 준공한 것으로 사료된다. 미륵사와 제석사 건립, 왕궁성 개·보수, 사비성 중축, 궁남지 조성 등은 지금도 수 조원이 들어갈 대역사다. 마를 팔아 근근이 살던 왕의 서자, 서동이 무왕으로 즉위해 수많은 전란에도 40여 년을 통치하고 훗날 지극정성 수명이 산악처럼 견고하도록 간구하는 것은 서동과 사택선화 사랑이 근원이 아니었을까?

무왕이 죽고 의자왕(641-660) 2년인 ’일본서기‘ 642년 기록에 사택왕후를 '국주모國主母‘(나라 주인인 어머니)라 한 사망기록만 봐도 부친 사택적덕이 실질적 ’나라 주인’으로 사택왕후를 결혼 전, 선화공주라 칭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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