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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 설화일 뿐

  • 입력 2019.01.18 15:39
  • 수정 2019.01.18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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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善化公主主隱/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之/夜矣卯乙抱遺去如(선화공주님은/남몰래 시집가/맛동방을/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일연 스님이 1279~1281년께 집필했던 삼국유사 서동요로 2009년 발견된 ‘금제사리봉영기’ 때문에 선화공주냐, 사택(탁)왕후냐 논란이다. 百濟王后佐平沙乇積德女(백제왕후는 좌평 사탁적덕의 딸)와 能謹捨淨財造立伽藍以己亥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능히 공경심을 갖고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가람=미륵사‘를 세우시고 ’기해년=639년‘ 1월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내용 때문이다. 선화공주를 구전설화에 의한 허구로 보거나 사택왕후가 잘못 전해진 것이라거나 별개 인물이라는 등 설왕설래다. 익산은 ‘역사도시’가 아닌 ‘설화도시‘인지 서동축제는 여전히 경주 선발 선화공주다.

왕후 앞에 국호가 붙어 정실왕후를 나타낼 뿐 아니라 ’백제왕후‘와 장인 ’사탁적덕‘이 앞면에 먼저 나오고 ’대왕폐하‘는 뒷면에 나온다. 엄청난 불경不敬인데 온통 왕후 중심이다. 봉영기 이전에도 선화공주 실존인물이나 ‘신라인‘ 여부를 놓고 논란이 계속됐다. 선화공주를 수십 년 주장했던 일부 사학계는 사택왕후가 나오자 잽싸게 별개 인물로 간주했다. 신라 선화공주가 존재해야 그간 석·박사 학위, 토론·연구발표회. 논문과 책자 등이 허구가 되지 않기 때문일까? 편집偏執이나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성確證偏向性은 ’진실왜곡‘으로 심각하다. 모든 것을 기존 주장 합리화에 맞춰간다. 역사와 설화는 다르며 역사가는 학설이 부정돼도 ‘정확성과 진실’이 생명인데도 10년째 애써 사택왕후를 ‘없는 사람(?)‘ 취급한다. 잿밥에만 탁월한 학자도 문제다. 혈세로 시·발굴을 한다며 포크레인 동원은 아연실색이다.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은 아들이 없이 두 딸을 두어 큰 딸 덕만德曼은 황룡사 9층탑을 착수했던 제27대 선덕여왕(632~647)이고, 작은 딸은 천명天明으로 제29대 태종 무열왕(654~661) ‘김춘추‘ 어머니다. 두 딸은 기록됐는데 ’백제왕후‘가 된 셋째 딸만 기록이 없다. 선화공주는 ‘삼국유사’에 소개될 뿐 김부식이 1145년 편찬한 ‘삼국사기’는 물론 왕과 왕후, 공주 및 화랑 우두머리인 풍월주 기록이 세밀한 김대문 ‘화랑세기’도 기록이 없다. 삼국사기는 백제 동성왕(493)과 신라 소지왕(479~500)때 공주도 아닌 신라 왕족 이찬 ‘비지’의 딸과 결혼한 사실도 기록했는데 훗날 백제왕과 신라공주 결혼 기록은 없다니. 화랑세기는 진평왕은 마야황후에 덕만과 천명공주만을 두었음을 기록했다. 마야황후 사후 승만왕후를 두었는데 아들을 한 명 낳았으나 태어난 직후 죽었다고 세밀히 기록했으나, 딸을 낳았다는 기록은 없다.

사통팔달인 지금도 경주 가기가 쉽지 않고, 사투리도 확연해 서동요를 유포시키자마자 첩자로 처형됐을 것이다. 왕후가 준 순금 한 말을 지닌 공주를 백제까지 데려올 수 있나? ‘산처럼 쌓인 황금’을 익산에서 하룻밤에 신라궁궐에 보낸단 말인가? 하룻밤에 보낼 궁궐은 사비(부여) 외에 없다. 신라 인심을 얻어 백제왕으로 등극하며 진평왕이 미륵사를 세우는데 장인을 보냈다는데 무왕(600~641) 즉위 직후인 602년 신라 아막성(남원 아영)을 공격하던 백제군사 4만 명을 몰살시킬 수 있나? 선화공주가 왕후로 백제궁궐에 있다면 가능한가? 당시 4만은 지금 40만 명보다 많다. 무왕 때 13번 전투는 다른 왕보다 훨씬 많고 11번을 백제가 공격했을까?

봉안기 내용도 선화공주가 동탑이나 중앙탑에 별도 봉안기를 남겼을 것이라는 주장과 모순된다. 사택왕후는 단순 석탑 발원·봉안자가 아닌 3탑·3금당·3원 사찰인 미륵사 최대 시주 및 건립 주체다. 가람은 사찰 일부가 아닌 미륵사 전체다. 무왕 통치가 42년에 달하고, 미륵사 건립이 수십 년 걸렸다는 점에서 왕후가 사택왕후만이 아닐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선화공주가 별도 발원해 절을 세웠다면 언급도 없이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웠다.“고 할까?

삼국유사 “무왕과 부인이 사자사로 가던 중 미륵삼존이 출현해 부인이 ‘대가람大伽藍’을 원해 세웠다.”는 내용과 봉안기 “재물을 희사해 ‘가람伽藍’을 세웠다.”는 내용이 똑같다. 진평眞平과 좌평佐平은 한문은 물론 발음도 흡사하다. 사택왕후 서자로 추정되는 의자왕(641~660) 즉위 직후, ’일본서기‘ 642년에 ”모후인 ’국주모國主母‘(나라 주인인 어머니)가 죽자 왕자 ’교기‘를 비롯 여동생과 관리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했다.“는 국주모가 사택왕후다. 일본 시각에도 국모國母(나라 어머니)보다 강한 ’국주모’다. 좌평 사탁적덕의 막강한 권력과 재력이 느껴진다.

절이 명맥을 유지했음을 알게 하는 소세양(1486~1562) 문집 양곡집陽谷集이나 폐찰 됐음을 알게 하는 강후진이 1738년 쓴 와유록臥遊錄(유금마성기遊金馬城記) 및 남태보 군수가 1756년 쓴 금마지金馬志 등과 임란 직전 기와가 발굴된 점에 비춰 1600년 전후 폐찰 됐다. 위치·규모는 달라도 미륵사는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 존재했던 절로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만 다를 뿐 사리장엄 봉영 640년 후 쓴 삼국유사와 기록이 없는 삼국사기, 화랑세기, 봉영기, 일본서기 등 모든 기록물에 상호모순이 없다.

정확히 예견한 이덕일과 이희근의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등 봉안기 발견 전의 많은 저술에도 ”선화공주는 상당한 세력을 가진 토착세력이다.“고 밝혔다. 현재 부여와 익산은 금강 웅포대교만 건너면 된다. 용화산(미륵산)과 부소산은 같은 백제 수도권이다. ‘수도권 외곽 익산 서동과 수도권 중심 부여 사택선화 ’일 개연성이 매우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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