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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백제사와 사리장엄, 사택왕후

  • 입력 2019.01.21 14:53
  • 수정 2019.01.21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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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사리장엄 ’백제 사택왕후‘와 삼국유사 ’신라 선화공주‘는 ’백제 사택선화‘로 동일인일 가능성이 짙다. “선화공주가 토착세력의 딸”이라는 주장은 ‘봉영(안)기’ 이전 많은 학자가 제기한 바 있다. 유리 사리병·금제사리내호·금동제사리외호·금제사리봉영기는 사택왕후 등 왕실 공양물이다.

고주몽 아들, 온조가 세운 백제는 한성(서울)백제(BC18~475)와 웅진(공주)백제(475~538) 및 사비(부여)백제 (538~660)로 나뉜다. 한성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당하자 문주왕(이하 재위, 475~477)이 웅진으로 천도했다. 훗날 동성왕(479~501)은 백苩·사沙·연燕 씨 등 웅진세력과 한성에서 온 귀족과 균형을 꾀하며 왕권강화에 전념했다. 특히 백제를 22개로 나누어 주로 왕족이 ‘담로장(분국왕分國王)’으로 통치하는 담로제를 확립했는데 6세기 전반 '웅포 입점리고분'에서 왕족만이 사용한 금동제 장신구 출토에서도 확인된다. ‘공주’도 국왕의 딸만 뜻하지 않아 분국왕이나 왕을 폐위시키거나 옹립할 정도 막강한 세력의 좌평 사택적덕 딸도 결혼 전 공주로 칭했을 가능성이 짙다.

고구려 남하에 493년 신라 소지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이찬 ‘비지’의 딸과 결혼한 동성왕도 좌평 백가苩加에 살해된다. 무령왕(501~523)이 백가를 토벌하고, 사비천도는 성왕(523~554) 16년(538) 이뤄졌다. 사비를 상·중·하·전·후 오부五部로 나누었는데 금제소형판 18점 중에 '“중부 덕솔(16관등 중 4품) 지율이 금 한 덩어리를 보시한다.(中部德率支栗施金壹枚)”와 “하부 비치부와 부모처자가 함께 보시한다.(下部非致夫及父母妻子同布施)”는 명문이 있다. 중·하부 관리 등이 봉영(공양)에 참여했다. 구슬 등이 가득 찬 보물로 지정된 6점 청동합 중 한 뚜껑에서 ‘上部達率目近’(상부달솔목근)이라는 음각이 둥그렇게 새겨졌다. “사비 상부에서 온 2품 달솔 ‘목근’ 공양물이다. 중부덕솔 ‘지율’과 하부 ‘비치부’는 송곳 등으로 공양 직전, 급히 쓴 글로 보이나 ‘상부달솔 목근’은 비교적 달필이다. 청동합에 구슬·금괴·금환·곡옥·마노·진주·직물이 가득 채워졌는데 ‘목근’ 공양물이다. 2점 은제관식은 6품 나솔奈率 이상 관모에 꼽았던 것이고 금제 족집게·금제 고리 11점·금괴 3점·4백여 점 금제구슬·은괴 등 무수한 공양물로 백제 수도 사비 왕족과 귀족·고위관리가 대거 참여하고 백성들도 운집했을 것이다.

사비궁궐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도성과 나성을 오부로 나눴다는 기록을 볼 때 중부덕솔은 궁궐관리, 상부달솔은 사비 북쪽관리·하부 비치부는 남쪽 민간인 같다. 하부 ‘비치부’는 관등은 없으나 삼엄했을 공양에 부모처자와 보시해 최고위층이다. 상·중·하부에서 참여했으며 달솔·덕솔은 사비부터 사택왕후를 수행했을 것이다. “서동요 주인공이 웅진시대 무령왕이다.”거나 사비 수도를 확증할 삼국사기 무수한 기록과 함께 ‘무왕의 익산천도‘ 주장에 반박자료가 될 듯하다.

성왕은 연합한 진흥왕에 553년 한강하류를 빼앗기자 아들 ‘여창’과 신라를 정벌하다 관산성(옥천)에서 전사한다. 여창이 즉위한 위덕왕(554~598)·혜왕(598~599)·법왕(599~600)을 거쳐 서동이 즉위한 30대 무왕(600~641)이다. 2년여 만에 네 명이어 극도 혼란을 딛고 무왕 42년 통치는 신라 진평왕이 아닌 ‘엄청난 백제귀족의 확고한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삼국유사 외에 한국·일본·중국 사서에도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 결혼기록이 없는 것은 ‘망국이 된 백제 내의 결혼’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짙다.
일부 사학자는 봉영기가 나오니 미륵사 초창初創은 신라 선화공주, 중창重創은 사택왕후가 했을 것으로 주장하나 무왕 초 602년 아막성 전투에서 신라 진평이 보낸 군사에 백제군 4만 명이 몰살해 신라 선화공주가 백제궁궐에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지금 40만 명 몰살보다 큰 참패에도 끄떡없는 왕권유지는 전쟁을 주도한 사택적덕 가문의 강력한 후원이 아니면 해석이 안 된다. 사택왕후는 무왕 즉위 전, 결혼한 사택선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막성은 현재 남원 아영면에 있으나 아영면은 과거 운봉현에 속해 아영·운봉 다 맞다.

삼국유사에 ‘대가람大伽藍‘을 창건하기를 원했다는 신라 선화공주와 사리장엄에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가람伽藍’을 만들어 세웠다.”는 백제 사택왕후는 동일인이다.

무왕은 법왕 아들이 아니다. 근년 중국에서 발견된 당나라에 끌려간 의자왕 태자, ’부여융扶餘隆’ 묘지명에 의자왕과 조부인 무왕은 나오나 통상 나오는 증조부 법왕 이름이 없는 것도 이를 반증한다. 법왕이 급변사태(?)로 1년 만에 바뀌었는데 아들을 왕위에 옹립할 수 없다. 아버지 용龍과 아들 장璋은 왕과 남자를 상징한다. 서동 어머니도 미모가 출중해 왕과 사이에 낳은 서동을 지키러 숨어 살며 ‘마’를 캐 연명하다 서동이 미염무쌍 ‘사택선화’를 찾아 사비에서 서동요를 유포시킨 것으로 사료된다. ‘흙처럼 쌓인 황금’을 지명법사를 통해 하룻밤에 사비 명문거족 좌평 사택적덕에 보내 인심을 쌓고 사택선화와 결혼해 법왕이 희생된 후 사택가문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론된다. 진평眞平과 좌평佐平은 한문은 물론 발음도 비슷하다. 사비궁 중수, 부여 왕흥사, 궁남지, 건평만 1만 평에 육박하는 미륵사, 왕궁성 개·보수, 제석사 등을 조영造營 하려면 현재도 수조兆가 들어간다. 사택적덕이 강력 후원세력이었다. 봉영 640년 후 사료수집에 심혈을 기우렸다는 고려 말 일연 스님도 사료가 적어 사택선화가 신라 선화공주로 바뀐 구전을 삼국유사에 기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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