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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미륵사(탑) 발원·봉안·시주·건립주체 사택왕후

  • 입력 2019.01.22 14:41
  • 수정 2019.01.22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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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사탁沙乇·사택沙宅=砂宅·사沙라는 성씨를 가진 왕족에 버금가는 귀족 상호관계나 왕권과의 역학구조가 백제 말과 미륵사 연구에 관심이다. 왕은 '부여夫餘'씨가 독점했으나 북사·수서·신당서 등에는 ‘백제8족’으로 사沙·연燕·협劦·해解·진眞·국國·목木·백苩 씨를 기록했다. 사 씨는 모든 사서에 8성 대족 중 가장 먼저 기록됐다.

사 씨 인물기록은 삼국사기·일본서기·중국사서·봉영기·정림사지5층석탑 대당평백제국비에 남아있다. 한성시대 사두沙豆를 비롯 동성왕(484) 때 내법좌평 사약사沙若思, 동성왕이 남제에 관작을 요청하는 표문에 왕후작위를 받았다는 사법명沙法名, 무령왕 때 달솔 사오沙烏, 일본서기(543)에 나온 상좌평 사탁기루己婁, 627년(무왕28) 신라 두 성을 함락시키고 개선한 사걸沙乞 장군, 639년 봉영기의 좌평 '사택적덕積德', 1948년 부여에서 발견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에 의자왕 14년(654)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과거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을 남긴 대좌평 '사택지적智積',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사탁상여沙矺相如, 신당서 돌궐과 전쟁기록에 나오는 사탁충의沙矺忠義, 660년 의자왕과 함께 소정방 포로가 된 대좌평 사택천복千福, 당나라에 압송됐다 웅진도독부 요직을 맡은 사택손등孫登, 일본으로 달아나 671년 대금하大錦下 벼슬을 받았다고 '일본서기'에 나온 사택소명紹明, 관세음응험기의 사문발정沙門發正 등 무수하다. 왕족인 부여 씨나 백제8족은 남아있지 않다. 백제멸망 때 도륙 당했거나 일본에 망명하고, 당나라로 압송됐거나 성을 바꿨기 때문이다.

'사탁적덕'과 관련, 주목할 인물이 '사택지적비'를 남긴 사택지적이다. '적덕積德과 지적智積'은 똑같이 '積'자가 있고 "지혜와 덕을 쌓으라."는 의미다. '선화善化'처럼 불교색채가 짙고 10여년 시차를 두고 왕의 장인인 좌평과 대좌평을 역임해 부자나 형제일 수 있다. ‘지적‘은 사찰·보탑을 세울 정도 부를 축적했다. ’적덕‘ 딸인 왕후가 가람(미륵사)을 세우고 봉영기를 남긴 것처럼 불교가문이다.

'봉영기' ‘가람’은 미륵사 전체이고, "‘대가람’을 선화공주 발원으로 세웠다"는 ‘삼국유사’와 일치한다. 선화공주가 삼국유사 외에 한국·중국·일본사서에 기록이 없고, 무왕 초 백제군 4만이 몰살한 아막성 전투(602), 사리장엄, 당시 정치상황으로 볼 때 사택선화가 유력시된다.

"서동은 '미염무쌍' 사탁적덕 딸을 찾아 사비(부여)로 간다. 서동요를 퍼뜨려 사택선화를 차지한 서동은 '흙처럼 쌓인 금'을 하룻밤에 지명법사 도움으로 사탁적덕에 보내 인심을 쌓고 결혼에 성공한다. 사택적덕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애환과 첫사랑이 서린 익산(금마)에 자주 들린다. 사자사 지명법사를 만나러 가다 사택선화가 가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해 미륵사를 세우고 사리호와 봉영기를 안치한다. 사택적덕은 막대한 재물을 시주할 뿐 아니라 백공을 보내 건립을 돕는다. 늙은 대왕 건강을 기원했으나 무왕은 2년 후 죽어간다."는 것이 진실이 아닐까?

의자왕(641~660) 즉위 후 '일본서기' 642년에 "모후인 ‘국주모國主母(나라 주인인 어머니)’가 죽자 왕자 '교기'를 비롯 그 여동생과 관리 40여명을 섬으로 추방시켰다."는 ‘국주모‘가 정실왕후 사택선화였으나 ’아들이 없어(?)‘ 후궁 소생인 의자왕이 40세 가까운 매우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632)된 것은 아닐지? 사택가문 위세에 눌린 태자 시절,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으나 집권 직후, 사택왕후가 죽자 사택세력을 거세한 것으로 풀이된다. 봉영기에 대왕폐하 만수무강 내용만 있을 뿐 태자(의자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도 이를 반증한다. 국립(왕립)사찰이므로 중앙탑은 무왕, 동탑은 태자가 발원했을 가능성이 짙다. 사택왕후와 애초 존재하지 않던 신라 선화공주가 각각 발원했다는 주장은 “봉안기 ‘역사‘에 삼국유사 ’설화‘가 허구로 드러나자 ’도피처‘로 삼은 주장“이다. 미륵사(탑) 발원·봉안·시주·건립주체는 사택왕후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1280년 전후에는 구전 밖에 없어 백제 사택선화가 신라 선화공주로, ‘백제좌평佐平’도 ‘신라진평眞平’으로 둔갑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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