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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함기석의 ‘수학자 누Nu 8’ 해설

  • 입력 2019.02.12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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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누Nu 8

-함기석

 

 거머리들이 지붕을 뒤덮고 있다 하늘은 검은 홍합으로 뒤덮여 있고 갯바위들이 거꾸로 솟아 있다 깊고 어두운 하늘에서 파란 눈의 인어들이 내 침실로 헤엄쳐 온다 눈을 뜬 채 나는 꿈꾸고

 시간이 수몰된 도시 광주(狂州)다 거머리들이 나사못처럼 지붕을 뚫고 있다 호텔 객실 창마다 죽은 여자들의 머리카락이 수초처럼 흐늘거리고 옥상 위로 핏빛 물결을 따라 요트들이 떠간다

 창가로 청어 떼가 몰려온다 푸른 공기방울을 피워 올리다 검은 어휘가 되어 나의 객실 바닥에 떨어져 파닥거린다 창밖 어둠 속에 비상 테이블이 떠 있고 누가 계엄의 수식을 정밀기록 중이다

 자정이다 밤은 목 없는 거북이고 기이한 해도(海圖)고 모르스 암호다 파란 머리칼의 인어가 내 침실을 빙빙 돌며 헤엄치고 있다 지붕을 뚫은 거머리들이 천장에서 뚝뚝 내 눈에 떨어지고 있다

 인어가 혀로 내 눈동자를 핥는다 스르르 나는 꿈을 깨며 잠든다 한 마리 물뱀이 되어 나는 창밖으로 헤엄쳐간다 밤의 대기는 무수한 총구멍이 뚫려 있다 내가 흰 구멍으로 들어가자

 잠 없는 꿈의 세계가 나온다 나는 또 구멍 속으로 빨려든다 잠 없는 꿈속 꿈속의 꿈속으로 계속 들어가자 참담한 현실이 나온다 봄밤의 강변이 나온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리고

 도시의 정수리에 흰 수레국화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다 육교 계단에 여인의 가슴 한 짝이 떨어져 있고 장갑차들이 뭉개버린 꽃밭에 소녀가 쓰러져 있다 소녀의 눈엔 강아지풀이 자라고

 소녀의 죽은 꿈을 휘감아 나는 강을 역류한다 꿈 밖 꿈 밖의 꿈 밖으로 계속 헤엄쳐 나오자 참혹한 꿈이 계속되고 있다 피를 빠는 새로운 거머리 비가 내리고 어두운 공중에 흰 테이블 하나 암호처럼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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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작품입니다. 낯설고 섬뜩한 이미지들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지붕을 뒤덮은 거머리’ ‘검은 홍합으로 뒤덮인 하늘’ ‘거꾸로 솟은 갯바위’ ‘파란 눈의 인어’ ‘죽은 여자들의 머리카락……, 읽어내려가면서 가위눌리는 체험과 유사한 체험을 했습니다. 물론, 작가는 느낌 그 이상의 의미를 시 안에 담았을 것입니다. 그 의미를 어떻게 새기든 문자를 통해서 환각과 유사한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매혹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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