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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허수경의 ‘저녁 스며드네’ 해설

  • 입력 2019.03.20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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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스며드네

- 허수경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물방울은 동그르 꽃 밑에 꽃 연한 살 밑에 먼 곳에서 벗들은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고 저녁 스며드네,

한때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모든 주막이 일제히 문을 열어 마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저녁을 거두어들이는 듯했는데,

지금 우리는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네 양념장 밑에 잦아든 살은 순하고 씹히는 풋고추는 섬덕섬덕하고 저녁 스며드네,

마음 어느 동그라미 하나가 아주 어진 안개처럼 슬근슬근 저를 풀어놓는 것처럼 이제 우리를 풀어 스며드는 저녁을 그렇게 동그랗게 안아주는데,

어느 벗은 아들을 잃고 어느 벗은 집을 잃고 어느 벗은 다 잃고도 살아남아 고기를 굽네

불 옆에 앉아 젓가락으로 살점을 집어 불 위로 땀을 흘리며 올리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빛 아래 그렇게 그렇게 스며드는 저녁, 저녁 스며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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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래전, 사냥에서 돌아온 인류는 온 부족이 함께 모여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웠습니다. 고기 즉, 남의 살을 나누어 먹으며 서로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더 이상 남이 아닌 사이가 되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고기를 굽는 풍경 속에는 먼 옛날 인류가 타인과 어울려 험난한 삶을 위로하며 살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습니다. “어느 벗은 아들을 잃고 어느 벗은 집을 잃고 어느 벗은 다 잃고도 살아남아 고기를 굽네”라는 구절을 쓸쓸히 씹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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