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박정대의 ‘사곶 해안’ 해설

  • 입력 2019.03.25 14:06
  • 수정 2019.03.25 14:07
  • 댓글 0

사곶 해안

- 박정대

 

고독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곳은 마치 바다의 문지방 같다

주름진 치마를 펄럭이며 떠나간 여자를

기다리던 내 고독의 문턱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었던 생의 밑바닥

그곳에서 횡행(橫行)하던 밀물과 썰물의 시간들

내가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던 울음을

끝내 갈매기들이 얻어가곤 했지

모든 걸 떠나보낸 마음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렇게 넓은 황량함이 내 고독의 터전이었다니

이곳은 마치 한 생애를 다해 걸어가야 할

광대한 고독 같다, 누군가 바람 속에서

촛불을 들고 걸어가던 막막한 생애 같다

그대여, 사는 일이 자갈돌 같아서 자글거릴 땐

백령도 사곶 해안에 가볼 일이다

그곳엔 그대 무거운 한 생애도 절대 빠져들지 않는

견고한 고독의 해안이 펼쳐져 있나니

아름다운 것들은 차라리 견고한 것

사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도

그 뒤에 남는 건 오히려 부드럽고 견고한 생

백령도, 백년 동안의 고독도

규조토 해안 이곳에선

흰 날개를 달고 초저녁별들 속으로 이륙하리니

이곳에서 그대는 그대 마음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또 다른 생의 긴 활주로를 하나 갖게 되리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멀리 있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도 그러합니다. 한 사람의 빈 자리는 그 사람이 사라진 뒤에야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이 시의 화자처럼 고독의 끝자락까지 밀려나는 견고하고 막막한 고통을 맛본 후에야 비로소 떠나간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깨닫게 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빈자리가 아무리 크다 해도, 그 고독이 아무리 깊다 해도 시간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랑에 관한 문학작품이 애도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놓치면 후회할 이시각 핫이슈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