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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허수경의 ‘포도나무를 태우며’ 해설

  • 입력 2019.05.27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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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를 태우며

- 허수경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사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살았습니다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이 늙었습니다

너덜너덜 목 없는 빨래처럼 말라갔습니다

알아볼 수 있어 너무나 사무치던 몇몇 얼굴이 우리의 시간이었습니까

내가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살아 있습니까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가을달이 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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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비틀어진 포도나무를 태우며 시인은 종국에는 말라비틀어져 한 줌 재로 변화게 될 자신의 삶을 생각합니다. 서 있는 포도나무와 재가 되기 위해 누워있는 포도나무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할까요? 그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고 포도나무가 사라진 후에도 존재합니다. 인간의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했고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존재할 것입니다. 시간 앞에 겸손해지지 않는 존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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