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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읽는 아침] 황병승의 ‘마음으로만 굿바이’ 해설

  • 입력 2019.07.30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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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만 굿바이

- 황병승

 

 차창에 기대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잠들었을 때 나는 네가 그 상태로 숨이 끊어져 아름다움을 완성하기 바랐다 긴 머리 원피스 녹색 타이츠의 소녀여 땀에 젖은 속옷이 열기를 뿜어대는 밤 우리는 조금 가까워졌고 가슴 속 네 발 짐승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어 너를 어떻게 해야할까! 안녕 널 보내주고 싶은데 컹 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아

 이봐, 신사양반 좀 점잖게 굴어! 그런데 가만, 이 미친 계집애가 오히려 내 목을 물어뜯을 셈이군 뻐근해, 싫어 이 기분

 차창에 기댄 너의 발그레한 두 뺨이 슬프게 떨릴 때 나는 네가 그 슬픔 속에서 심장을 움켜쥔 채 고꾸라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제발 내 옷소매를 놓아줘 축축한 양말이 미끌거리는 밤 가슴 속엔 으르렁거리는 이빨들이 추위에 떨고 있어 긴 머리 원피스 녹색타이츠의 소녀여 너를 이렇게 두어도 될까!

 이 더러운 계집애 이 더러운 계집애, 가랑이 속에 냄새나는 털을 잔뜩 품고 있으면서! 구역질 나, 싫어 이런 감정

 미안해 미안해, 말하고 싶지만 사나운 발톱이 네 얼굴을 못 쓰게 만들어버릴 것 같아 다가서고 싶지만 널 한입에 물어 죽일까 두려워

 너는 부드러운 손길 다정한 목소리 모두 나에게 주었지만 나는 너에게 줄 것 아무 것도 없고 너를 얌전히 보내주기도 싫어 뒤죽박죽의 머리칼이 불처럼 타오르는 밤 너를 이대로 보내도 좋을까! 긴 머리 원피스 녹색 타이츠의 소녀여, 마음으로만 마음으로만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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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부음은 언제나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젊은 시인의 죽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지난 주, 황병승 시인의 안타까운 죽음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한국 문단에 미래파의 시대를 연 그는 열렬한 환호와 맹렬한 비난의 중심에 서 있던 작가였습니다. “슬픔 속에서 심장을 움켜쥔 채” 그가 쓴 이별의 시를 읽습니다. 이별상황에서 남자가 느끼는 충동적인 생각의 흐름을 이성과 감성의 줄타기를 통해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너를 이대로 보내도 좋을까!”라는 문장이 참 아리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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