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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읽는 아침] 천서봉의 ‘처서(處暑)라는 말의 내부’ 해설

  • 입력 2019.08.2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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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處暑)라는 말의 내부

- 천서봉

 

  골 진 알밤, 무딘 칼날 세워 보늬 긁는다. 겨의 주름 깊이 길이 나 있다. 더위가 물러가는 길, 길을 따라 또 길이 돌아오는 길.

  죽은 할미도 달의 오래된 우물도 모두 내 안구 속으로 돌아와 박힌다. 깊어가는 수심의 습지에서 남보다 더 오래 우는 개구리의 턱이 깊다.

  지나간 애인들의 뒤통수가 전봇대마다 건들건들 매달려 있다. 울음소리를 참아온 나무들이 투명한 손바닥을 여름의 뒷등에 비빈다.

  앵앵거리는 추억은 다만 비틀어져갈 뿐, 하나도 안 아프다. 그런 모기의 주둥이처럼 저녁이 오고, 한두 겹의 내력을 더 견디며 나는, 고요의 중심으로 천천히 내려가리라.

  더위가 물러가는 길, 파르라니 깎은 몇 개의 알밤을 바가지에 담그면 달의 손바닥들이 내 오래된 뇌(腦)를 쓰다듬는다. 서늘한 나의 카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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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는 입추와 백로 사이의 절기입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이 시기에는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에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시인은 계절의 순행을 빌어 뜨겁고 아름답게 타오르던 시절이 가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시절은 젊음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뜨거운 열기를 식히고 이제 아픔조차 차분해져야 하는 시기, 수심은 더 깊어지고 내면에는 한두 겹의 내력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가을에 다가가 익어가는 벼에게 생겨난 겨의 주름처럼 우리 몸 어딘가에 주름의 길이 하나 더 생겨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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