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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읽는 아침] 김중일의 ‘야행’ 해설

  • 입력 2019.09.0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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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

- 김중일

 

  어릴 때 옆집의 광필이는 제 아버지 직업을 야간여행자라 적었다.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구멍 뚫린 쪽배로 난바다를 건너온 난민이라 했다. 백지 같은 백주 위로 금세 낙서가 가득했다. 검은 낙서로 가득차 어둑한 해거름이면 나뭇잎을 짊어진 개미들이 일렬로 골목을 횡단했고, 그는 야행을 떠나며 개미들이 그어놓은 절취선을 따라 일력처럼 부욱 한 장의 하루를 찢어 갔다. 학교 화단에 꽂아놓은 모종삽처럼, 주머니에 오른손을 꽂고 있었다. 별을 캐는 사람이라 했다. 한번은 절벽에 핀 초질량의 별을 따다 되레 오른손이 그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었다 했다. 대신 별빛 번쩍이는 공중을 깎아 의수처럼 매달고 다녔다. 광필이 눈이 멀까 봐 늘 주머니 속에 오른손을 찌르고 다녔다. 주머니 밖으로 청어 지느러미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간밤에 객잔에서 만난 여자의 한쪽 유방을 움켜쥔 채, 그대로 주머니에 넣고 도주해 온 것처럼 터질 듯 불룩하기도 했다. 따뜻했던 유방은 곧 유빙처럼 녹아버렸다. 봄이 오면 검은 양복을 차려 입고, 주머니 속에서 흰 나비를 꺼내기도 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한 송이 국화였다. 떨어진 그것을 주워 펼쳐보니 불과 몇 시간 전에 자정의 원어로 야행의 규율을 받아 적은, 백지였다. 글자 사이로 구불구불 미로가 그려진, 구겨진 지도였다. 그는 그날 밤도 야행을 떠났고, 돌아오는 지도를 버리고 갔으므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광필이는 제 주머니를 조금씩 더 깊이 파며 아름다워졌고, 허벅지 속에 새까만 꽃씨를 많이도 심었고 착하거나 예쁜 여자들을 발굴했으며 고백하기 위해 모국어를 독학했다. 한국어로 고백하는 건 귀싸대기를 얻어맞는 것만큼 화끈거리는 일이라는데 나도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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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친구인 광필이네 아버지는 “별을 캐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개미들이 그어놓은 절취선을 따라 일력처럼 부욱 한 장의 하루를 찢어” 야행에 나서곤 했습니다. 그는 늘 오른손을 주머니에 꽂고 다녔는데, 그 속에는 청어가 들어있기도 하고, 유빙처럼 녹아버리는 따뜻한 유방이 들어있기도 하고, 봄날에는 흰 나비가 들어있기도 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자정의 원어로 야행의 규율을 받아 적은” 백지를 흘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밤, 야행을 떠났던 그는 “돌아오는 지도를 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 “광필이는 제 주머니를 조금씩 더 깊이 파며 아름다워졌”다고 합니다.

신비롭고 몽환적인 우수로 가득 찬 초현실적 분위기가 매혹적인 작품입니다. 친구의 외팔이 아버지에 대한 이 환상적인 이야기를 읽다 보면 감당하기 힘든 슬픔의 무게에 짓눌리게 됩니다. 별에서 온 난민으로 이 세상에 잠시 왔다가 어느 날 야행에서 돌아오는 지도를 잃어버린 사람, 누군가에게 그는 사무치게 그리운 아버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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