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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김왕노의 ‘내 생의 북쪽’ 해설

  • 입력 2019.09.1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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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북쪽

- 김왕노

 

   내 생의 북쪽에는 망가진 폐차와 함부로 떨어뜨린 정액이, 실수로 낸 상처의 피가 종일 흘러가고 내 생의 북쪽에는, 초속 몇 십 미터의 돌풍이 불고 돌풍에 떨어진 푸른 과일,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와 그 옆에서 지켜보는 독수리, 내 생의 북쪽에는, 다리가 잘린 비둘기의 오후가, 와사풍이 온 처녀와 목 잘려 버둥거리다 절명하는 닭과 피임에 실패한 가난한 주부와 약에 취해 역주행하는 마흔 살과 내 생의 북쪽에는, 아직도 새파란 철조망과 총구와 공개총살이, 내 생의 북쪽에는, 내가 낙타 한 마리로 건너려는, 내 생의 북쪽에는

   내 생의 북쪽에는, 쓸쓸한 달을 벗해 밤새 건널 내 생의 북쪽에는, 사막 여우를 닮아 긴 귀를 가진 주민과 외로움에 찬 울음과 내 생의 북쪽에는, 전갈이 우글거리는 거리와 황야의 정거장과 사막화되어가는 가슴과 낮달이 쓰러져 바스락거리는, 내 생의 북쪽에는, 절필한 시인이 살고 있는 내 생의 북쪽에는, 끝없이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북향의 집과 북향의 솟대와 북향의 머리와 북향의 노래 내 생의 북쪽에는, 내 생의 중심이 한 때는 기울어갔던 내 생의 북쪽에는, 납북된 유년이 수감되어 늙어가는 채찍이 등에 붉은 핏자국을 남기는, 내 생의 북쪽에는, 한때 내 엄마의 고향 사과 꽃이 바람에 날리던 내 생의 북쪽에는, 내가 낙타의 갈증으로 건너려는, 내 생의 북쪽에는

   내 생의 북쪽에는, 내 생의 북쪽을 건너다 누가 남긴 하얀 뼈마디며 내 생의 북쪽 뼈마디마다 새겨진 갑골문자, 주머니에서 털어버리지 못해 한 계절 주검 곁에서 핀 붉은 꽃들, 내 생의 북쪽으로 날아갔다 돌아올 힘이 없어 주저앉아버린 철새들이며, 내 생의 북쪽에는, 태아가 버려진 장면이며 내 생의 북쪽에는, 씨 없는 과일이며 눈 없는 토끼며, 지금은 균열이 간 신화며 날조된 역사며, 내 생의 북쪽에는, 반항을 잃어버린 주먹과 분노를 잊어버린 눈동자가 사는, 내 생의 북쪽에는, 수공업으로 만들어지는 단단한 절망과 비애가 사는, 내 생의 북쪽에는, 기어코 내가 원정군처럼 찾아갈 내 생의 북쪽에는, 내 그리운 이름이 유배된 내 생의 북쪽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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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은 빛이 들지 않는 쪽입니다. 따뜻한 햇볕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는 환한 남쪽과는 달리 그늘지고 어둡고 습한 곳입니다. “절망과 비애”, “외로움에 찬 울음”으로 가득한 곳, 그래서 “상처의 피가 종일 흘러가고” 곳곳에 “붉은 핏자국”이 남아있는 곳이 북쪽입니다. 동시에 그곳은 “차마 털어버리지 못”한 것들을 쌓아두는 곳이기도 합니다. “돌풍에 떨어진 푸른 과일”마냥 꺾여야 했던 젊은 날의 꿈이 서려 있는 곳,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가난한 어머니와 병든 누이, 그 “그리운 이름이 유배된” 곳입니다. 마음을 시리게 하는 인생의 그늘……,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북쪽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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