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풍석 서유구·완영일록·황화정!
[칼럼] 풍석 서유구·완영일록·황화정!
  • 고재홍 기자
  • 승인 2019.11.27 1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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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다산 정약용(1762-1836)과 함께 당시 대표 실학자인 풍석楓石 서유구(1764~1845) 선생 기념관 ‘자이열재自怡悅齋’ 개관식이 26일 전주 한옥마을 향교길에서 서창훈 풍석문화재단 전북지부장과 김승수 전주시장 등이 참석해 열렸다. 풍석은 1833년(순조 33년) 4월 10일(음력) 전라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도순찰사·전주 부윤으로 부임해 1834년 12월 30일까지 재임했다. 지금 전라남북도와 광주광역시, 제주도 4개 시·도지사를 겸하고 전주시장과 수 개 지역 사단장에 해군 사령관, 4개 시도 지법원장과 지검장·경찰청장까지 겸한 셈이니 막강했다. 

서유구가 유명한 것은 권력과 명예 때문만이 아니다. 전라관찰사 등을 제수(임금이 벼슬을 내림)받은 날부터 이임 날까지 기록한 ‘완영일록完營日錄’을 남겼기 때문이다. 완영은 완산감영=전라감영이니 완영일록은 감사 재임 중 매일 기록한 공무일지로 사료가치가 매우 뛰어나다.

조선 585명 전라감사 중 전해지는 것은 완영일록이 유일하며, 풍석이 1836년(헌종 2) 1월부터 1837년 12월까지 수원 유수 재임 중 남긴 ‘화영일록華營日錄’도 귀중한 사료다.

필자는 풍석문화재단 전북지부에서 한문으로 쓰여진 완영일록을 한글로 번역한 <역주 완영일록 상·하 2권>을 정독했다. 풍석은 ‘달성 서씨’ 권문세족으로 이조판서 서호수(1736-1799)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75세에 대사헌에 임명됐으나 사직상소로 32년 벼슬을 끝으로 지금 서울 강북구 번동인 ‘번계樊溪’에서 생활하며 113권 52책 250만 자 방대한 저술로 조선 후기 농업과 일상생활을 파악할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도 남겼다.

특히 완영일록은 4월 10일 감사 제수 교유서敎諭書(교서와 유서로 국왕 명령문서) 전문부터 당일 한양 남문에서 임금이 내린 활과 화살, 호초(후추) 및 납약을 하사받고 부임 과정과 일자, 거리 등을 상세 기록했다. 남문에서 친척과 친구, 문하생과 전별하고 오후 노량진을 건넜다. 시흥 30리(노량진에서 30리 떨어진 시흥)에 당도해 1박 했다.

이튿날 11일 아침 출발해 화성 50리(시흥에서 50리 떨어진 수원 화성)에서 묵었다. 성환·천안·광정·공주·노성·은진을 거쳐 15일 전라도 초입인 여산 황화정皇華亭에 도착했다. 고을 현감이나 현령, 충청 관찰사 등과 만나는 내용도 기록했다. 황화정에서 전라도 각 고을 수령 등 환영을 받고 전임 관찰사 이규현과 임무 교대식인 교귀식交龜式을 가져 인수인계를 했다. 직후 도계到界(임지인 전라도 경계 여산에 도착)했다는 장계狀啓(왕에 올리는 보고문서)를 발송했다. 불과 186년 전인데 공문용어가 엄청 생소하다. 여산 객사에서 관내 수령방백과 연명延命(처음 보는 의식)을 행했다. 삼례역을 거쳐 전주부 오리정에서 영접 행사에 참여하고, 전주 남문에서 견여肩輿를 타고 조경묘와 경기전에 숙배(왕이나 왕족 및 왕의 선조에 하는 절)하고 감영 집무실인 선화당에서 고을 수령과 인사했다.

풍석은 전라감사로 재임하며 전라도 53개 부·목·군·현과 제주 삼읍(제주목·대정현·정의현) 등을 관장했다. 완영일록에는 황화정 임무교대식은 물론 감사 재임 중 궁도 시합이나 백일장에서 부채를 하사 하는 내용도 있다. 농사 권장과 살인 등 각종 사건 처리 및 소지所志(소장이나 청원 및 진정서)도 해결했다. 매월 1일과 15일이나 명절, 왕과 왕비 생일에 객사에서 한양을 향해 망궐례望闕禮(관원이 절하는 일)도 실시했다. 각 고을 수령 업무를 평가하는 포폄褒貶(창찬하고 나무람) 방목을 기록하고 국왕에 보고했다. 요즘 입법예고제와 같은 선갑先甲도 시행됐다. 전주 용머리고개를 용두치龍頭峙라 했고, 관찰사가 관할지를 돌아보는 순행巡行도 했다. 환곡 부정과 과거제 폐단이 비일비재했음도 알 수 있다. 영암 109세, 남원 105세 등 전라감영 관할지에만 13명 1백세 이상 노인이 있어 쌀과 술, 쇠고기를 올려 공경했고, 효자·열녀를 기리고 전염병과 기근으로 창고를 열어 보리 등으로 백성 규휼에 나섰다. 군관이나 비장을 사칭해 백성을 결박하고 주리를 틀어 수백 냥을 강탈하는 공무원 사칭도 적지 않았다.

특히 압권은 고을 아전 등이 몰래 빼 먹은 환곡 부정이 들킬 것이 두려워 한양으로 곡식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일부러 파선·침몰시키는 습속과 작태가 적지 않음도 알 수 있다. 장흥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세곡선이 지금 서천과 군산 중간 바다에서 침몰하자 두 지역 수령들이 서로 상대지역 바다라고 떠넘기는 바람에 오랜 세월 조사하는 진풍경도 연출했다, 당장 곡물을 건져야 하는데 골칫거리는 남에게 전가해 전혀 건져내지 못하는 어처구니였다.

이번 개관한 풍석 서유구 선생 기념관 ‘자이열재自怡悅齋(절로 즐거워지는 집)’는 퇴임 후, 번계에서 풍석이 생활하던 공간 명칭이다. 산중생활을 즐겼던 중국 도홍경이 쓴 시에서 따온 ‘자이열’은 “스스로(절로) 기쁘고 즐긴다.”는 의미다.

풍석문화재단 완영일록 번역사업에 이어 자이열재 개관식을 축하하며, 복원 중인 전라감영에 이어 1960년대 충남 논산시에 편입된 황화정과 후백제 왕궁성 복원, 전주 동문과 서문 및 전주 일부 성곽과 전주 오리정도 복원했으면 싶다. 전북도와 전주시, 익산시가 논산시와 협의해 황화정을 복원하고 취타대 등 수백 명이 참여한 임무교대 축제를 벌이고 전라감영에서 수령방백 인사를 받는 행사나 고을 순행 축제 등을 전담할 부서와 인원 확보도 절실하다. 한옥마을에 국한된 영역을 대폭 확대해 폭증할 관광수요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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