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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안상학의 ‘북녘 거처’ 해설

  • 입력 2020.01.07 10:20
  • 댓글 0

북녘 거처 / 안상학

 

당신은 인생길에서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까

나는 갈 수만 있다면 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다만

1978년 여름 한 달 살았던 불암산 아래 상계동 종점

가짜 보석 반지를 찍어내던 프레스가 있던 작은 공장

신개발 지구 허름한 사람들의 발걸음

먼저 자리 잡고 프레스를 밟던 불알친구

비만 오면 질척이던 골목 안 그 낮은 지붕 아래

내가 살아본 이 세상 가장 먼 북녘의 거처

돌아갈 수만 있다면 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그해 여름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탄 열일곱 소년

행복과는 거리가 먼 러셀의 책 한 권

싸구려 야외전축 유행가 레코드판 몇 장

세 번째 아내를 둔 아버지가 살던 셋방을 벗어난 까까머리

전형처럼 후줄근하게 비는 내리고 청량리 앞 미주아파트

식모 살던 동생이 남몰래 끓여준 라면 한 끼 훌쩍이던 식탁

형제자매처럼 무학을 다짐하던 소년

상계동 종점 창이 없는 그 집 열일곱 한 달

그 어느 하루로라도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지금은 지하철 4호선 종점 당고개역 솟은 그 너머

아배 편지 한 장 받아들고 눈물 찍으며 돌아섰던

이제는 의지가지없는 그 곳

불알친구는 십년 뒤 낙향하여 낙동강에 목숨을 흘려보냈고

편지 한 장으로 나를 불러 내렸던 아배도 오래 전 소식 없고

식모 살던 동생도 다른 하늘을 이고 산 지 오래

열일곱 소년만 꼬박꼬박 혼자서만 나이 먹어가며

이 낡은 남녘에서

다 늦어 또다시 가출을 감행할 꿈을 꾸며

그 북녘을 떠올려 봅니다만, 벌써부터 야외전축도 없고

난 정말 몰랐었네 최병걸 레코드판도 없어진 지 오랩니다만,

갈 수만 있다면 단 몇 시간만이라도

내 삶의 가장 먼 북녘 거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

당신은 인생길 어디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없습니까

있다면 남녘입니까 북녘입니까

북녘입니까 남녘입니까

미안한 일인지 어떤지 나는 아직 그 북녘입니다만,

당신, 당신들은 지금 어느 녘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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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누구에게나 생각만 해도 마음 시린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시인에게는 가난했던 젊은 날 보낸 낮은 지붕을 가진 먼 북녘의 거처가 그런 곳인 것 같습니다. 햇빛이 들지 않아 늘 그늘져있던 그곳. 하지만 허름하고” “질척이는그 북녘의 거처에 갈 수만 있다면 가고 싶다고 합니다. 두고 온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던 열일곱 소년과 이승과 저승으로 나뉘어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친구와의 한때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기에 배부르고 등 따신 오늘이 있겠지만, 따뜻한 남녘의 아랫목에서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은 그 고단했던 삶의 순간에 빛나고 있던 젊음과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가까웠던 이들의 따뜻한 체온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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