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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쌍릉에 대한 역사왜곡 논란!

  • 입력 2020.02.1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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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백제 무왕릉 지정 취소하라. 쌍릉 역사 왜곡 중지하라. 대왕릉은 (청주한씨 시조) 마한馬韓 태조 무강왕릉이다. 익산은 역사도시인가, 설화도시인가? 백제 왕도가 아니라 마한 왕도다.”

쌍릉 재발굴 전후, 대왕릉이 백제 무왕릉이라는 일부 주장에 청주한씨 중앙종친회와 마한태조무강왕수호범대책위 종원은 지난 1월 9일, 익산시청에서 한태락 위원장 등이 나서 구호를 외치는 등 ‘역사 왜곡·조작 규탄대회’를 가졌다. 지난해 4월에도 비슷한 집회가 있었다.

사적 제87호, 익산시 쌍릉은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이뤄졌다. 1917년 ‘야쓰이세이치(곡정제일谷井濟一)’가 최초 발굴했다. 고려 충숙왕 때 도굴기록이 상세해 목관 등 외에는 별 유물이 없었다. 이때 대왕릉 출토 어금니로 여성이라고 판정해 대왕릉은 선화공주나 사택왕후이거나 소왕릉이 마한 무강왕이나 무왕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세이치’ 발굴 100주년을 맞아 대왕릉과 소왕릉 재발굴이 시작됐다. 익산시는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소장 최완규) 주도로 2억5천여만 원을 들여 ‘대왕릉’ 발굴을 2017년 9월 착수했다. 별도 4억 원으로 ‘소왕릉’ 발굴 등에 활용할 계획이었다. 도굴돼 ‘세이치’도 별 유물을 발견치 못했는데 예산 낭비 여론도 제기됐다. 중국·일본·한국 정사에 취급도 안한 무수한 ‘신앙 간증’ 체험기인 고(괴)문서 ‘관세음응험기’를 사료로 취급하며, ‘익산천도’ 운운하나 응험기 첨부설 등 조작설도 제기됐다. (응험기) 무광왕武廣王=(쌍릉) 무강왕武康王=무왕武王인가?

“발굴에 앞서 대왕릉에서 무왕을 기리고 조사 무사안전을 기원하는 고유제를 진행한다.”는 자료가 배포됐다. 시작도 전에 “대왕릉은 무왕릉이고, 소왕릉은 선화공주릉이다.”는 전제로 재발굴했다. “무왕 영령을 위무한다.”며 발굴에 앞서 술잔을 올리는 어처구니다. 청주한씨는 마한 무강왕을 시조로 섬겨 쌍릉에 청주한씨 공적비도 있는데 말이다. “‘무왕로·선화로’ 도로명까지 버젓한데 그냥 ‘무왕과 선화공주릉’이라 선언하지, 6억5천만 원을 들여 발굴인가?”라며 ‘돈 잔치’ 비판도 제기됐다. 청주한씨 반발과 집회는 확대됐다. 객관성이 의문인 기관에 재발굴이 맡겨졌다. 이리시와 익산군이 익산시로 통합 이전, ‘마한제’ 축제를 지내고, 익산시는 서동공원에 ‘마한관’을 세워놓고 중요 유물·유적을 서동(무왕)·선화공주와 연계시키고, ‘서동축제’를 개최했다. 서동이 어릴 적, 익산에 살았다는 것은 대부분 인정한다. 일부 사학계는 이를 넘어 정통 사학계가 인정치 않는 ‘백제왕도(익산천도)·무왕릉과 선화공주릉·왕궁성이 백제 왕궁’이라는 불확실한 주장을 해 오던 터다. 마한 유물·유적은 사라져 ‘역사후퇴’다. 심지어 2009년 발견된 미륵사지서탑 사리장엄 금제 소형판·청동합에서 사비(부여)를 상·중·하·전·후 오부五部로 나누었다는 기록을 입증할 상부·중부·하부 명문銘文이 나왔으며, 사택왕후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가람(미륵사)을 만들어 세웠다.”는 기록에도 ‘무왕릉·백제 왕궁이나 애초 없었던 신라 선화공주’를 반복하는 어처구니다.

대왕릉 재발굴에서 2018년 3월 나무 유골함에 담긴 뼛조각 102점을 발견돼 그해 7월 공개됐다. 전문가들은 161~170㎝ 키에 육십 대 이상 남성 한 사람 것으로 정강이뼈에서 떼어낸 시료를 분석해 연대측정 결과, 620~659년 숨진 가능성이 68%라고 발표했다. 백제 무왕으로 추정됐다. 일부 학자는 “무왕이십니다. 예를 표하시죠.”라고 하며 뼛조각에 고개를 숙이는 어처구니다. 탄소 연대측정에 의한 인골 연대측정 ‘정확성(?)’에 의문이 제기돼 왔고, 키는 9cm, 측정연대도 40년 차이가 나고 100%도 아니어 사실이 아닐 수 있는데도 같은 주장을 해온 일부 사학계의 무왕으로 단정은 성급하다.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뿐이다. 특히 삼국사기 무왕이 사비에서 머문 많은 기록과 익산 기록이 없는 점, 백제멸망은 사비·웅진에서 이뤄졌고, 백제·신라 전쟁기록, 마한 호강왕虎康王 혹은 무강왕武康王과 비의 기록, 사리장엄 명문 등에도 인골 연대측정만으로 단정은 금물이다. 자신들의 시조 묘가 ‘부여씨扶餘氏’ 성을 가진 백제 무왕이라는데 ’청주한씨‘ 반발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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