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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청주한씨 시조릉과 백제 무왕릉

  • 입력 2020.03.01 15:49
  • 수정 2020.03.01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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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청주한씨 문중은 수많은 역사기록을 근거로 “쌍릉 ‘대왕릉’은 청주한씨 원元시조인 마한馬韓 무강왕武康王, ‘소왕릉’은 무강왕 비다.”고 주장한다. 일부 사학계 “백제 무왕武王(재위 600~41)과 선화공주 혹은 사택왕후” 주장과 대별된다.

익산 쌍릉은 국가 소유로 익산시가 관리한다. ‘고려사절요’ 충숙왕 16년(1329) 3월 금마군에 있는 마한 조상 호강왕(무강왕)릉 도굴범 기록이 상세하다. ‘고려사’에도 쌍릉은 무강왕과 비릉이라 기록됐으며, 실학자 이긍익 ‘연려실기술’에도 “무강왕은 기자조선(후조선) 마지막 왕인 기준箕準이며 위만에 나라를 뺏기고 남쪽 금마산에 마한국을 세웠다.”고 기록됐다. 고조선(옛 조선)은 단군·기자·위만조선으로 분류됐다. ‘삼국유사’ 마한 편에도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이 궁인·신하를 끌고 바다를 건너 남쪽 ‘한韓’ 땅에 나라를 세워 마한이라 했고, 수많은 사서에 금마는 ‘기준왕’이 천도한 곳이며 후後 마한 옛 도읍지”라 기록됐다. ‘무강왕 세보’ 등에도 북원(태원)선우씨·상당(청주)한씨·덕양(행주)기씨 등 3대 성씨 시조라 했다. 마한 8대 원왕元王 세 아들이 ‘태원선우씨·청주한씨·행주기씨’가 됐다고 한다. 청주한씨는 원왕 둘째 ‘우량’ 원손인 고려 개국공신 한란韓蘭이 시조이므로 무강왕은 원시조다.

금마金馬는 조선시대 익산군 중심지 전부터 ‘마한왕도’다. 후 마한왕조 시조는 무강왕(기준)으로 후한서·권람 응제시주·다산 정약용 아방강역고 등에 기록됐다. ‘왕궁성’도 마한궁궐부터 출발해 백제·통일신라·후백제 견훤 이후까지 활용됐다. 이리시·익산군이 ‘익산시’로 도농통합 이전, 익산군은 금마에서 ‘마한제’ 축제를 벌이고, 익산시도 서동공원에 ‘마한관’을 건립했다.

필자가 1990년대 초 이리시 담당일 때는 ‘마한궁궐 왕궁성’은 백제 사비(부여) 궁궐 임금 나들이 때 ‘이궁離宮·행궁行宮’이나 ‘천도추진·실패’설 정도였다. 근년 특정사학계는 왕궁성은 ‘백제왕궁’, 쌍릉은 ‘무왕릉과 선화공주릉’을 주장하다가 2009년 사리장엄 봉영(안)기가 나오자 ‘사택왕후릉’ 주장이 가세됐으며 ‘백제왕도(익산천도)‘가 사실처럼 거론된다. 국사편찬위가 익산에 있는 듯 새로운 역사로 중요 유물·유적이 백제무왕과 연계돼 마한왕도만 실종됐다.

百濟王后佐平沙乇積德女(백제왕후는 좌평 사탁적덕의 딸)과 謹捨淨財‘造立伽藍’以己亥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깨끗한 재물을 삼가 희사해 가람(미륵사)를 만들어 세우고, 기해년(639) 1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는 명문으로 사택왕후가 미륵사 발원·봉안·시주·건립 주체다. 일부사학계는 잽싸게 사택왕후와 선화공주를 별개 인물로 간주하고, 신라 진평왕 딸, 선화공주는 동탑이나 중앙 목탑을 발원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삼국유사만 믿은 결과다.

선화공주는 “익산이나 부여 토착세력 딸이다.”라는 주장이 사리장엄 발견 전부터 있어왔고, 사택왕후가 ‘조립석탑石塔’이 아닌 ‘조립가람造立伽藍’ 주체로 서탑이나 서원西院만이 아닌 ‘미륵사’ 창건주역으로 ‘사택왕후=선화공주=사택선화’일 개연성이 짙다. 서동(무왕)은 경주가 아닌 사비에서 서동요 유포가 유력하다. 왕후 앞에 국호가 붙어 정실왕후임을 반증하고 희사한 재물로 미륵사를 세웠다는 기록에도 선화공주를 별개 인물로 만들어야 수십 년 ‘신라 선화공주’ 주장이 허구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일까? 서동이 어릴 적 익산에 살았던 점은 인정된다. 삼국유사 외에 고구려·백제·신라 등 한중일 사서에 전혀 없는 신라 진평왕 셋째 딸 선화공주는 애초 존재치 않았다. 사택왕후=사택선화가 유력하다. 백제왕도(익산천도)·무왕릉과 선화공주(혹은 사택왕후)릉은 ‘짜 맞추기’라는 청주한씨 반발 근거다.

신라 지증왕 502년 ‘순장殉葬’(남녀 궁인을 함께 묻음) 금지 기록으로 볼 때 마한 순장 풍습도 백제까지 연결됐을 것이다. 대왕릉 인골 탄소연대 측정이 100% 정확치 않아 마한 무강왕인지, 순장 유골인지 모른다. 수많은 도굴기록으로 1917년 야쓰이 세이치 발굴에도 별 유물이 없었는데 ‘무왕릉과 선화공주릉’ 학설 세력이 엄청난 예산을 들여 재 발굴을 주도해 객관성이 의문시됐다. 대왕릉 ‘인골’ 외에 유물이 없어 ‘돈 잔치’ 비판이 입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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