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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관세음응험기’와 ‘수부首府’(전)

  • 입력 2020.03.02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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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귀함(거북선) 황자총통은 적선을 놀라게 하고, 적선에 한 발 쏘아 필히 수장한다.龜艦黃字驚敵船 一射敵船必水葬” 1992년 해군 충무공 해전유물발굴단(단장 H대령)은 거북선 황자총통을 인양했다고 발표했다. 충무공 ‘한산대첩’ 현장인 통영시 한산면 문어포에서 건져냈으니 세상이 떠들썩했다. ‘만력 병신년(1596·선조29) 6월 제작해 (배에) 올린 별황자총통萬曆丙申六月日造上 別黃字銃筒’ 명문까지 새겨진데다 임란사를 전공한 J해사박물관장 등이 진품이 분명하다고 해 국보 제274호로 지정된 ‘귀함별황자총통’이다. 발굴단 해체와 준장 진급이 걱정된 H대령은 S골동품상이 1987년 제작해 한문을 새기고 화공약품으로 부식시킨 것을 92년 500만원에 매입했다. 이를 바다에 빠뜨린 후 인양한 ‘한국최대 국보 조작사건’이다. 1996년 8월 문화재위는 4년 전 자신들이 국보 지정한 가짜총통을 국보해제 했다. ‘문화재위’와 ‘해군’도 치욕이었다. 발굴성과·예산, 승진과 돈이 얽힌 희대의 국보조작 사건이다.

국보11호 미륵사지서탑 사리장엄 금제사리내호·금동제사리외호·금제사리봉영기·6개 청동합 등 총3건9점이 2018년 보물1991호로 지정됐다. ‘총통’ 국보사건 여파로 국보지정이 까다로워져 보물지정 되고 3-5년 후, 국보 2-3개가 추가될 조짐이다.

정사正史는 한성(서울)백제와 웅진(공주)백제, 사비(부여)백제(538~660)만 인정한다. 일부는 무왕(600~641)의 ‘익산천도(금마백제)’를 주장한다. ‘신라 선화공주’는 삼국유사라도 기록이 있으나 ‘백제왕도·익산천도’는 한중일 사서에 전혀 없다. 일종의 ‘신앙 간증’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와 ‘익산토성’ 발굴 ‘수부首府’ 기와 등이 근거다. 그러나 응험기 뒷부분 첨가설 등 조작설이 오래 전부터 나돈다. 수부 기와가 진짜라도 해석 차이가 많다.

무왕의 ‘익산천도’ 근거도 황당한 ‘관세음응험기’가 일부에서 활용된다. 발견과정과 내용은 물론 사료로써 인정키 매우 어려운 고(괴)문서다. 김명환(87) 향토사학자는 “서울 모 대학 H교수가 도내 모 대학에 관계할 때 공개했으며, 천도설은 마백연구소 학술지 등에 발표한 일본학자 마끼다 다이로 교수 연구서(1970)가 기초됐다.”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 사서에 없거나 무왕 때 사비 궁이 명백한데 일본에서 응험기 최초 발견자와 국내 공개자 등이 이 대학 관계인물로 ‘역사왜곡·조작’이라 비판한다. 작고한 인물 성함까지 거론된다. 2008년 개관한 “‘마한관’ 전시물도 중국산 짝퉁이거나 출처가 모호한 복제품으로 감사원 감사결과 밝혀졌는데 특정대학 C교수가 관계됐다.”는 주장이다. H교수는 가짜 총통사건 국보심사도 했다는 보도다.

응험기 내용도 ‘조작설’에 기름을 붓는다. 앞13줄은 양무제 연호로 502~519년인 양梁 ‘천감天監’인데, 뒤5줄은 당태종 연호인 ‘정관貞觀13년(639년)’이어 최소 120년 차다. “두 사람 응험기인지, 첫 내용을 쓴 사람 예언인지?” 1965년 왕궁리석탑 사리장엄이 나왔고, 사리장엄이 봉안됐음을 알 수 있는 제석사 심초석이 폐사터에 남았으며, 통상 사찰은 방화나 실화로 폐사될 뿐 아니라 금마·왕궁에는 “제석사가 화재로 사라졌다.”는 구전이 공공연해 ‘백제 무광왕武廣王 천도 지모밀지(금마)’ 외에는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는 점도 ‘조작설’이 나도는 이유다.

응험기를 내세우는 사학자들은 “심초석에 들어 있던 타지 않는 유물이 금판 금강경이고 부처님 금사리함인데 1400년 전, 불타지 않았던 그(제석사) 유물이 1965년 (제석사지 지척인) 왕궁리5층탑에서 출토돼 국보123호로 지정됐다. 정관13년 기해11월 불타버렸다는 제석정사 터에 보물이 있던 심초석이 그 위치에 그대로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논리모순이다. 응험기에는 “모두 타 버린 절(제석사)을 다시 세워(경조사更造寺) 이(사리)를 보관했다.”는 것으로 무왕이 두 번이나 제석사를 세운 후, 다시 폐사된 제석사지 심초석을 벼락 맞을 당시 심초석으로 여기는 것이다. 두 번 절을 지으며 처음 벼락 맞은 심초석 방치는 말도 안 되고, 사리는 탑에 봉안하는 것으로 두 번째 심초석은 없는데 최초 심초석만 1400년 후인 현재까지 남아 있다는 논리도 상황 전후를 오해한 모순이다. 관세음응험기 실물 공개검증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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