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칼럼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관세음응험기’와 ‘수부首府’(후)

  • 입력 2020.03.03 15:58
  • 댓글 0

[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백제무왕이 익산에 언제 천도해 언제까지 왕궁성에 거주했나요?” “천도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청주한씨 종원들이 지난 1월 9일 가진 ‘역사왜곡·조작 규탄대회’에서 필자 질문에 익산시 문화역사 중견 공무원 답변이다.

백제왕도(익산천도) 근거라는 일본 교토 청련원에 소장된 ‘관세음응험기’ 조작설은 “정관貞觀 13년 기해(639년) 11월 제석사가 벼락으로 모두 불탔는데. (중략) 수정병에 사리가 없었다. 대왕(무왕)이 법사를 청해 참회하고 병을 열자, 불사리 6개가 내병內甁에 있고 밖에서도 6개 모두 보였다. 대왕과 궁인 신심이 독실해져 재산을 내어 즉시 공양해 다시 절을 지어 이(사리)를 보관했다.”고 단정했다는 점이다. 중간에 두 번 겨울이 있는 불탄 지 1년4개월 후인 641년 3월 무왕이 사망했는데 당시 국력으로 그 사이 대규모 절과 탑을 다시 세웠다는데 믿을 수 있는가? 미륵사지서탑 사리장엄 봉안 10개월 후로 무왕 사망 1년4개월 전이다. 사택왕후가 주도한 ‘봉안기’에 大王陛下年壽與山岳齊固(대왕폐하 수명은 산악처럼 견고하고)라고 기록됐다. ‘무왕 장수와 건강’ 기원 내용으로 봉안 당시 무왕은 ‘와병’으로 익산에 오지 않은 것이 유력한데 응험기에는 건강한 모습이다. 앞13줄과 뒤5줄도 최소 120년 차다. 두 사람 응험기인가?

‘삼국사기’에도 무왕이 익산에 머물렀던 기록은 전혀 없고, 사비(부여)에서 활동기록은 상세하다. “638년, (무)왕이 큰 못(궁남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 641년 3월 왕이 사망했다. 시호를 ‘무武’라 했다.”고 기록됐다. 삼국사기도 638년 여름께부터 사망한 641명 3월까지 기록이 없다. ‘중병’ 때문으로 추정되는데 응험기만은 아주 건강한 듯 기록됐다.

종교·무속·영웅담에는 기이기적奇異奇蹟, 초능력이 흔하다. ‘성령으로 잉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였다는 ‘오병이어五餠二魚’나 “목에서 흰 젖(피)이 솟고,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진동하더니 꽃비가 내렸다.”는 ‘이차돈 순교’, “지명법사가 하룻밤에 신라궁궐에 금을 보냈다.”는 것 등은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다. 불교 ‘신앙 간증’인 응험기도 “법사를 청해 참회하니 없던 사리가 보였다”거나 “모든 물건을 버리고 관음경을 외었더니 배가 침몰하지 않고 무사했다.”는 관음보살 영험함을 강조한 남북조 시대 이후 유행했던 무수한 응험기 중 일부다. ‘중국 관음보살상 연구’ 저자인 강희정은 “남북조 시대 중국사회 관음신앙 정착과 유행 정도를 짐작케 해주는 ‘위경僞經’들이다.”고 단정했다. 인도에서 전해진 불전이 아닌 ‘거짓 경전’이라는 말이다. 이런 내용은 “선교(포교) 방편이나 자신의 종교적 능력 및 신심信心 확대포장에 악용되거나 신앙에 몰입했을 때 허상·착각도 적지 않다”고 종교전문가들은 설명한다. 관세음응험기는 육하원칙에 따라 ‘실물 공개검증’으로 뒷부분 ‘추가 첨부설(?)’을 해명해야 한다. 역사는 설화나 ‘신앙 간증’ 같은 황당한 응험기도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한 수단도 아니며 ‘정확성’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정체불명 ‘관세음응험기’에 ‘수부首府’ 명 기와도 백제왕도(익산천도) 근거로 내세운다. 2017년 8월, “사적 제92호 익산토성(오금산성=보덕성) 발굴에서 익산이 백제 무왕 대 수도였음을 증명할 首府 기와가 출토됐다.”는 보도자료가 배포됐다. “왕궁성은 백제왕궁, 쌍릉은 무왕·선화공주릉”임을 주장해 온 연구소가 발굴을 주도했다. “首府 기와는 수도지역 유물로 사비(부여) 왕궁 관북리 유적 6점과 부소산성 1점이 출토된 바 있는데 익산토성 首府명 기와는 왕궁출토 13점과 함께 익산이 백제수도首都 증명자료다.”는 것이다.

그러나 首府는 ‘중앙정부가 있는 도시’를 뜻하지만 ‘(감영 등이 있던) 주요도시’도 의미한다. 전주(충주·공주)도 전라(충청) 수부首府라 한다. 특히 금마·왕궁은 기준성과 함께 기준(무강왕)이 세운 후後 ‘마한’왕도이며, 신라가 고구려 유민 ‘안승’을 금마저金馬渚 왕으로 봉해 백제부흥운동을 잠재우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보덕국報德國(674-684년)’도 존재했다. 견훤이 건국한 ‘후백제’ 완산주에 포함됐다. ‘수부’ 기와로 천도 주장은 성급하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놓치면 후회할 이시각 핫이슈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