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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조지훈의 ‘병에게’ 해설

  • 입력 2020.03.09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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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전염병이 도는 21세기 도시의 삶은 황량하기만 합니다. 밖으로 자유롭게 나다닐 수도 없는데 자꾸만 따스해지는 날씨가 더없이 얄밉게 느껴집니다. 질병은 잊을만하면 나를 찾아와 이제는 좀 쉴 때가 되지 않았냐고 직언을 날리는 친구입니다.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오는 이 친구가 썩 반갑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는 소중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유난히 병약해서 질병을 달고 살았다는 시인 조지훈, 그는 지긋지긋할 법한 병마에게 자네라고 부르며 그의 방문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건강관리에 소홀했던 날들을 반성하고 갈 때는 기쁘게 보내줍니다. 이 시를 읽으며 머지않은 날에 병마를 기쁘게 보내줄 수 있도록 잠시만 더 버티자고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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