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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미륵사(탑) 발원·시주·건립 ‘사택왕후’ 가문

  • 입력 2020.03.2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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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사탁沙乇·사택沙宅=砂宅·씨라는 귀족 상호관계나 왕권과 역학구조가 관심이다. 북사·수서·신당서 등에는 백제8으로 사·······씨를 기록했다. 왕족인 부여扶餘씨와 해·진씨는 북방 부여계이고, ··백씨는 금강유역 토착 마한계다. 사 씨는 모든 사서에 8성 대족 중 가장 먼저 기록됐다.

삼국사기·일본서기·신당서·남제서南齊書·봉영기·정림사지5층석탑대당평백제국비 등에 사 씨 기록이 있다. 한성시대 사두沙豆를 비롯 동성왕(484) 때 내법좌평 사약사沙若思, 동성왕이 남제에 관작을 요청하는 표문에 왕후작위를 받은 사법명沙法名, 무령왕 때 달솔 사오沙烏, 사비천도 세력으로 일본서기(543)에 나온 상좌평 사탁기루己婁, 627(무왕28) 신라 두 성을 함락시키고, 포로를 잡은 사걸沙乞 장군, 639년 봉영기의 좌평 사택적덕積德’, 일제가 부여에 신궁을 세우려던 돌무더기에서 나온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에 의자왕 14(654) 퇴임 후 과거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는내용을 남긴 대좌평 사택지적智積’, 백제부흥운동 사탁상여沙矺相如, 신당서 돌궐과 전쟁기록의 사탁충의沙矺忠義, 660년 소정방에 의자왕과 함께 포로가 된 대좌평 사택천복千福, 당에 압송됐다 웅진도독부 요직을 맡은 사택손등孫登, 일본으로 달아나 671년 대금하大錦下 벼슬을 받았다고 일본서기에 나온 사택소명紹明, 관세음응험기 사문발정沙門發正 등 무수하다. 왕족인 부여 씨나 백제8족은 지금은 없다. 백제멸망 때 도륙 당했거나 일본에 망명하고, 당나라로 압송됐거나 성을 바꿨기 때문이다.

사탁적덕과 관련, 주목할 인물이 사택지적비를 남긴 사택지적이다. ‘적덕積德과 지적智積지혜와 덕을 쌓으라.”는 의미다. ‘선화善化처럼 불교색채가 짙고 10여년 시차를 두고 왕의 장인인 좌평과 대좌평을 역임해 부자나 형제일 수 있다.

 

훗날 좌평을 통괄하는 상좌평이 설치(408)됐는데 6좌평으로 정착됐다. ‘봉영기’ ‘가람은 미륵사 전체이고, “대가람을 선화공주 발원으로 세웠다삼국유사와 일치해 사택선화일 가능성이 짙다. 신라 선화공주가 삼국유사 외에 한중일 사서에 없고, 백제군 4만이 몰살한 아막성 전투(602)와 사리장엄·당시 정치상황으로 볼 때 그렇다. 모든 기록에 상호모순이 없어진다.

서동은 미염무쌍좌평 사탁적덕 딸을 찾아 사비(부여)에서 서동요를 퍼뜨려 사택선화를 차지한다. ‘흙처럼 쌓인 금을 하룻밤에 지명법사 도움으로 실질적 나라의 주인사탁적덕에 보내 인심을 쌓아 결혼한다. 장인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애환이 서린 익산(금마)에 들린다. 사자사로 가다가 사택선화가 가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해 미륵사를 세운다. 말년에 사택왕후가 늙은 대왕 건강을 기원했으나 무왕은 2년 후 죽어간다.는 것이 진실이 아닐까?

의자왕(641~660) 일본서기’ 642년에 모후인 국주모國主母가 죽자 왕자 교기를 비롯 여동생과 관리 40여명을 섬으로 추방했다.”국주모가 정실왕후 사택선화였으나 아들이 없어(?)’ 후궁 소생인 의자왕이 40세 가까운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632)된 것으로 보인다. 사택가문 위세에 눌린 태자 시절, “효도로 섬기고 형제와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으나 사택왕후가 죽자 사택세력을 거세한 것으로 풀이된다. 의자왕이 41명을 좌평에 임명해 좌평 실권을 빼앗은 것처럼 사택가문과 대립관계다. 봉영기에 대왕폐하 만수무강 내용만 있을 뿐 40대 태자(의자왕)에 언급이 없는 점도 이를 반증한다. 중앙탑·금당은 무왕, 동탑·금당은 태자가 발원했을 가능성이 짙다. 사택왕후와 애초 없던 신라 선화공주가 각각 발원했다는 것은 억지다. “신라 선화공주를 주장해 온 사학계가 봉안기 역사에 삼국유사 설화가 허구로 드러나자 도피처로 삼은 주장이다. 미륵사() 발원·봉안·시주·건립주체는 사택왕후다.

수많은 전란에 사서는 멸실되고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는 사리장엄 봉안(639) 640년이 지난 1279년 전후여서 신라 선화공주로 바뀐 구전을 기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봉영 21년 후 멸망한 백제좌평佐平신라진평眞平으로 둔갑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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