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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백제왕도·무왕릉(?) 역사와 익산기록

  • 입력 2020.03.2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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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왕궁성은 마한 궁궐 기록이 있으며 백제·통일신라·후백제 이후까지 활용됐다. 쌍릉은 무수한 사서에 후後마한 태조 무강왕(기준)과 부인릉으로 기록됐다. (무왕기준) 1400년(?)이 흐른 인골이 발견돼 연대측정이 100% 정확치도 않는데 무왕으로 단정했다. 마한유물은 사라졌다. 익산천도 근거라는 관세음응험기는 사료로 인정키 어려운 고(괴)문서로 실물을 본 사람이 거의 없다. 앞13줄과 뒤5줄은 최소 120년 차이가 나 ‘첨부(조작)설’이 나돌았다. 뒤5줄 내용도 석연치 않다. 실물 공개검증이 없는 한, 응험기를 근거로 ‘백제왕도’ 운운은 비웃음을 초래한다.

위덕왕(재위 554-598) 사망 후 혜왕(598-99) 즉위에 이어 법왕(599-600), 무왕(600-641) 순이다. 2년 만에 네 명이다. 극심한 혼란기와 신라와 전쟁, 미륵사 건립 등 출혈을 딛고 무왕 40여 년 통치는 백제귀족의 확고한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왕을 옹립·폐위할 좌평 사탁적덕이 아니면 해석이 안 된다. 사택왕후가 사택선화일 개연성이 짙다.

(삼국사기)에 “602년 ‘(무)왕‘이 출병시켜 신라 아막성을 포위했다. 신라왕 ‘진평’이 기병 수천 명을 보내 불리해 돌아왔다. 신라가 침범해 (무)왕이 좌평 해수에 4만 명으로 싸우게 했으나 해수 혼자 돌아왔다.”고 기록됐다. 즉위 직후 백제군사 4만 명이 몰살해 왕권몰락이 우려되나 끄떡없다. 이런 상황에 무왕이 왕궁에서 신라 선화공주가 사랑을 속삭이다니 믿을 수 없다. 사택선화가 아니면 해석이 안 된다. 사택가문이 전쟁을 주도했고 사위인 무왕을 후원했다. “630년 2월 사비궁을 수리하고 왕은 웅진으로 갔다. 가물어 공사를 중지하고 왕이 7월 웅진에서 돌아왔다. 634년 2월, (부여) 왕흥사가 준공됐다. 3월, 대궐 남쪽 못(궁남지)을 파 물을 끌어 섬을 쌓았다.”고 기록됐다. “636년, 왕이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대왕포다.”는 기록으로 부여읍 왕포리다. “636년 8월 왕이 망해루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638년, 왕이 큰 못(궁남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 641년 3월 사망했다. 시호를 ‘무武’라 했다.”고 기록됐다. 신라와 13번 전투 중 11번을 백제가 공격해 ‘진평과 무왕’은 ‘옹서(장인과 사위)’도 아니고 ‘천도’ 기록도 없다. 무왕의 사비·웅진 활동은 상세하나 익산기록은 전혀 없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660년에 “계백이 전사하자 도성(사비)을 에워싸니 (7월13일) 의자는 밤에 도망해 웅진(공주)으로 피난하고 아들, 부여융은 대좌평 (사택)천복과 항복했다. (18일) 의자가 태자 등을 데리고 웅진에서 항복했다.”고 나온다. 무왕 사비궁 수리나 의자왕도 멸망 직전, 공주성으로 갔다. 무왕이 어릴 적 애환이 서린 왕궁에 천도했었다면 오래 전 수도인 공주로 갔을까? 한성·웅진·사비는 ‘한강과 금강’으로 방어에 유리한데 비산비야 왕궁성을 세워 천도했다는 말인가? 사비천도 후, 남원 방향 신라와 전쟁 및 사비 방어 전초기지로 활용하려 기존 왕궁성을 중수했을 정도로 추정된다. 사비를 상·중·하·전·후 오부五部로 나누었는데 사리장엄 금제소형판과 금동합에 ‘상부·중부·하부’ 명문에도 백제왕도인가?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은 아들이 없이 두 딸을 두어 큰 딸 덕만은 제27대 선덕여왕(632~647)이고, 작은 딸은 천명으로 제29대 태종 무열왕(654~661) ‘김춘추’ 어머니다. ‘백제왕후’가 된 셋째 딸만 기록이 없다. 선화공주는 ‘삼국유사’에 소개될 뿐 김부식 ‘삼국사기’는 물론 왕과 왕후, 공주 및 화랑 우두머리인 풍월주 기록이 세밀한 김대문 ‘화랑세기’에도 없다. 삼국사기는 백제 동성왕(493)과 신라 소지왕(479~500)때 공주도 아닌 신라 왕족 이찬 ‘비지’의 딸과 결혼한 사실도 기록했는데 훗날 백제왕과 신라공주 결혼 기록은 없다니.

익산문화원 발행 ‘익산향토지2’에도 “무왕이 금마에 천도를 추진했지만 완성치 못했다. 천도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백제가 망할 때 수도가 사비(부여)임은 ‘역사적 사실’로 무왕이 금마로 ‘천도’했다면 의자왕이 사비로 ‘재천도’했다는 것으로 중요사건이 삼국사기 등 어떤 사서에도 기록이 없어 천도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못을 박았다. 지역에서조차 인정치 않는 백제왕도(익산천도) 주장은 해괴하고, 대왕릉의 무왕릉 단정은 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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