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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읽는 아침] 이기철의 ‘별이 뜰 때’ 해설

  • 입력 2020.04.2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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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뜰 때 / 이기철

 

  나는 별이 뜨는 풍경을 삼천 번은 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별이 무슨 말을 국수처럼 입에 물고 이 세상 뒤란으로 살금살금 걸어오는지를 말한 적이 없다

  별이 뜨기 전에 저녁쌀을 안쳐놓고 상추 뜯으러 나간 누이에 대해 나는 쓴 일이 없다

  상추 뜯어 소쿠리에 담아 돌아오는 누이의 발목에 벌레들의 울음이 거미줄처럼 감기는 것을 말한 일이 없다

  딸랑딸랑 방울을 흔들며 따라오던 강아지가 옆집 강아지를 만나 어디론가 놀러 가버린 그 고요함을 말한 일이 없다

  바삐 갈아 넘긴 머슴의 쟁기에 찢겨 아직도 아파하는 산그늘에 대해,

  어서 가야 하는데, 노오란 새끼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벌레를 잡지 못해 가슴을 할딱이는 딱새가 제 부리로 가슴 털을 파고 있는 이른 저녁을 말한 일이 없다

  곧 서성이던 풀밭들은 침묵할 것이고 나뭇잎들은 다소곳해질 것이다

  부엌에는 접시들이 달그락거리며 입 닫은 딱새의 말을 대신 해줄 것이다

  별이 뜨면 사방이 어두워져 그때 막내 별이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문간으로 나올 거라는 내 생각은 틀림없을 것이다

  별이 뜨면 너무 오래 써 너덜너덜해진 천 원짜리 지폐 같은 반달이 느리게 느리게 남쪽 산 위로 돋을 것이라는 내 생각은 틀림없을 것이다

  별이 뜨면 벌들과 딱정벌레들이 둥치에서 안 떨어지려고 있는 힘을 다해 나무를 거머쥐고 있는 것을 어둠 속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별이 뜨면 귀뚜라미가 찢긴 쌀 포대에서 쌀 쏟아지는 소리로 운다고 터무니없는 말을 나는 한 마디만 더 붙이려고 한다

  이것들이 다 별이 뜰 때, 별이 뜨면 생기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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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최근에 별을 본 게 언제인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분명 매일 밤, 별이 우리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밤을 밝히는 인간의 불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별들은 꼭꼭 숨어버립니다. “별이 뜨기 전에 저녁쌀을 안쳐놓고 상추 뜯으러” 가는 목가적인 풍경 대신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 햇반과 상추를 사오는 게 현실이지요. 그래서 “이 세상 뒤란으로 살금살금 걸어오는” 별만 잃어버린 걸까요? 슬프게도, 발목에 감기는 벌레울음과 옆집에 놀러 간 강아지가 두고 간 고요, 쟁기에 찢긴 산그늘, 숟가락을 문 채 문간으로 나오는 막내별, 너무 오래 써 너덜너덜해진 반달과 벌레 울음소리마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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