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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장석주의 ‘내일’ 해설

  • 입력 2020.05.2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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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 장석주

 

착한 망치가 계단 아래에 있고

여름 아침의 구름은 하천에 방치되었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고 동생들과 옥상에 서 있었다.

들 한가운데 정류장이 두 군데 서 있고

그 너머로 청동의 강들이 뱀처럼 구불구불 흘러갔다.

문맹인 아이들이 옥수수를 먹고 있었다.

독재자의 동상 아래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구부러진 못은 왜 시가 안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정오가 지나자 공중의 나비들이 땅에 떨어졌다.

파초 잎에 후두두 빗방울이 떨어졌다.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해에 홍수가 졌다.

커다란 잉어들이 하천을 거슬러 올라올 때

외삼촌들이 그물과 양동이를 들고 하천으로 나갔다.

그 무렵 마을 처녀들이 사라졌는데,

노란 나비를 따라갔다는 풍문이 번졌다.

아주 길고 혹독한 겨울이 닥칠 것이라고 했다.

내일은 얼마나 긴 하루가 될까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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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가끔씩, 시라는 게 여러 겹의 얇은 천으로 아름다운 몸을 가린 무희를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황홀한 움직임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맨살이 보는 사람을 아찔하게 만드는 그건 것 말입니다. 이 작품은 각도에 따라 달리 읽히는 매혹적인 작품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름다운 유년의 여름날 풍경을 몽환적이면서도 가슴 따뜻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섬뜩한 단어들에서 서슬 퍼런 독재의 칼날 아래 자유를 잃어버린 민중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한 개인의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와 현대사의 가장 아픈 시대가 겹쳐지는 그 부분이 이 시를 아름답지만 아프게 읽히게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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