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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김종직 시비 및 ‘조운선 전시관’과 위령탑!

  • 입력 2020.07.1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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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변산반도 부안 해난사고’는 1993년 10월 10일, 위도면 파장금항에서 격포로 가던 중 침몰해 362명 승객 중 292명이 숨진 ‘서해훼리호’ 침몰사건이 있다. 위도 진리에는 위령탑이 세워졌다. 승무원 14명을 포함, 221명 정원을 초과하는 362명 승객과 화물을 적재했다. 심청이 몸을 던졌다던 임수도 해상에서 돌풍을 만나 회항하려다 침몰됐다. ‘서해훼리호(110t)’와 ‘세월호(6825t)’는 선박규모와 선장 처신만 빼고 비슷하다. 사투를 벌이다 숨진 서해훼리호 ‘백운두’ 선장 존함은 지금도 회자된다.

그러나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변산반도 부안 해난사고’는 잘 모른다. 김종직(1431 세종-1492 성종)이 전라관찰사 시절, 삼백여 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한 ‘부안 모항 앞바다 조운선漕運船 침몰사고’다. 화폐가 발달치 않은 고려·조선에 곡식을 조세로 바치는 세곡稅穀이 발달했다. 우마차 외에 운반기구도 없고 도로도 형편없으니 개경이나 한양으로 육로 운반은 극히 어려웠다. 수운을 이용해 조운선·세곡선에 곡물을 싣고 경창으로 운송하는 조운이 발달했다.

영남학파 종조宗祖(시조·교조)로 성리학 대학자 ‘점필재 김종직’은 정여창·김굉필·김일손·남효온 등이 제자다. 그의 ‘조의제문’을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던 일을 유자광이 ‘세조 즉위를 비난한 것’이라고 연산군에 고변해 일어난 무오사화(1498) 때 부관참시 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종직의 ‘고부민락정망조선古阜民樂亭望漕船‘(고부 민락정에서 조운선 쪽을 바라보며)’라는 한시를 보자. “삼월이십구일(1488년), 법성포에서 조운선 60여 척이 부안 변산에 당도해 바람을 만났는데 작당鵲堂에 정박한 34척은 모두 온전하고, 모항茅項 앞바다에 정박한 배들은 모두 폐선 돼 익사자만 3백여 명이다.”고 기록했다. 이어 “쌀을 운반하다(중략) 파도가 요동치니 반은 침몰하고 반은 표류됐네.(중략) 죽은 자로 통곡소리 진동하건만(후략)”이라는 내용이다. 특이한 내용도 있다. “작당마을 후미진 곳을 보니 바다 전체가 미꾸라지 같은 놈들이 숨을 곳이네.”라는 내용이다. 당시 지방관청과 조운선 운반을 하며 조곡을 빼 먹는 관리가 부지기였다. 장부보다 곡식이 엄청 부족하니 백성을 쥐어짜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조운선을 운반하며 정박항에서 운반 곡식을 파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때문에 실제 선적 곡식보다 훨씬 많이 실은 것으로 장부조작하고 침몰시키는 사건이다. 한 척에 100석을 싣고 1000석을 실었다고 기록하고 풍랑을 기다려 침몰시켜 누락 곡식을 숨기는 방법이다. 증거인멸을 위한 위장 침몰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도 많았다. 인양기술도 없을 때니 대부분 넘어갔으나 모진 고문과 추궁도 적지 않았다. 김종직은 작당 마을 배는 온전하다는 보고를 받고 이들을 의심한 듯하다. 

‘녹미탄(쌀을 건져내며 탄식하다.)’는 김종직 한시에서는 “1만8천석 운반 조운선이 침몰해 겨우 3700석을 건졌으나 썩어 자라 먹이로 주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탄식을 한 곰소만이다. 영광 법성포에서 올라오던 세곡·조운선이 태풍을 만나 곰소만에 피신했다가 대량 침몰한 것이다. 변산면 모항은 곰소만 바깥바다로 풍랑이 들이칠 곳이고, 진서면 운호리 작당은 3.5km 가량 곰소만 동쪽(안쪽)으로 풍랑이 비교적 덜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고부민락정망조선’과 ’녹미탄‘ 한시는 1487년 5월부터 1488년 5월까지 전라관찰사로 재임한 김종직이 침몰 소식에 전주에서 고부를 거쳐 현장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남긴 한시로 사료된다. 1488년 음력 삼월이십구일이니 양력 4월말이나 5월초다.

차제에 모항 전망 좋은 곳에 위령탑도 세우고, 김종직 관련 시비 및 ‘조운선 전시관’ 등도 세우는데 참조했으면 싶다. 고려·조선 조운제도와 경창 및 호남 3대 조창인 ‘군산창·성당창·법성창’ 등 전국 조창 및 세곡을 둘러싼 관리부정, 만석보 수세를 비롯한 고부군수 조병갑 수탈 등으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과 일제 쌀 수탈 등을 기록한 역사산실로 만들면 모항해수욕장과 함께 주요 관광자원이 될 듯하다. 인구는 없는데 수십·수백억을 들여 공원·정원 등에 과잉투자 보다 ‘스토리(이야기)와 역사가 있는 개발방안’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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