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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강인한의 ‘말세리노의 추상(追想)’ 해설

  • 입력 2020.07.21 11:55
  • 댓글 0

말세리노의 추상(追想) / 강인한

 

내 어린 날의 잿빛 안개 속엔

측백나무 가지 사이로 숨바꼭질하는 작은 새처럼

부끄럼 많은 소년이 살고 있습니다. 마누에라,

금단추 교복에 모자를 이마까지 눌러쓰고

그 가난한 골목 어귀 전신주에 기대어

소년은 오늘 밤도 가로등처럼 추억을 밝히며 서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반색하며 다가오다, 눈길 마주치면

그냥 안개의 커튼 뒤로 얼굴을 감추는 키 작은 소년,

마누에라, 언제인가 꽃집 미모사에서 당신은

여왕의 입술처럼 붉은 장미꽃 화분을 사서

소년의 가슴에 안겨주었습니다.

잠깐 당신이 장미의 꽃말을 헤아렸는지 잘 모르지만

그러나 얼마나 재빠른 습격이었던지.

뛰어가는 당신 가랑머리에서 나풀나풀 파란 리본이

환상의 나비처럼 보이던 그때

마누에라, 당신은 아직 수줍고 어린 아가씨였지요.

밤 여울 물소리가 돌돌 산의 어깨를 감아내려

노랗게 발갛게 물들일 무렵,

당신이 귀 기울이던 허밍의 어떤 화음은

소년의 가슴에 닿아 설레는 꽃잎으로 날렸습니다.

그 해 가을 죄보다 짙붉은 피는 마룻장에 구르는

낙엽으로 지기도 했는데요, 마누에라

그리고 당신은 소년을 투명한 물방울로 허공에 튕긴

스러질 듯 안타까운 저녁놀이었습니다.

사라사테의 고운 바이올린 선율 아래에서

깊은 밤 편지를 꺼내어 읽고 또 쓰던

소년의 분홍빛 볼을 당신은 이 밤에 떠올릴 수 있겠지요.

마누에라, 내 어린 시절 꿈결처럼 피어오르는 안개 속에는

비스킷 지붕 새하얀 동화의 집이 가물거리고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이 거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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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오래전, “부끄럼 많은 소년이있었습니다. 그는 금단추 교복에 모자를 이마까지 눌러쓰고” “가난한 골목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곤 하던 조용한 소년이었습니다. “언젠가 꽃집 미모사에서한 소녀가 여왕의 입술처럼 붉은 장미꽃 화분을 사서/ 소년의 가슴에 안겨주었습니다.” 소녀는 부끄러웠는지 도망치듯 뛰어갔습니다. 달아나는 소녀의 어깨 위, 갈래머리 끝에 매달린 파란 리본이” “나비처럼” “나풀나풀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소녀가 흥얼거리던 노래는 소년의 가슴에 닿아 설레는 꽃잎으로 날렸습니다.” “깊은 밤 편지를 꺼내어 읽고 또 쓰던/ 소년의 분홍빛 볼을 그녀는 기억할까, 노인이 된 소년이 가슴 속에 살고 있는 늙지 않는 소년에게 조용히 물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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