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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이수한

송광사 '치성광여래도' 의 환지본처還至本處

  • 입력 2020.07.24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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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국외 유출 성보

환수고불식 : 7월 23일(목) 14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로비

순천 송광사 치성광여래도
순천 송광사 치성광여래도

[내외일보] 이수한 기자 = 대한불교조계종(총무원장 원행스님)은 국외로 유출되었던 조계총림 송광사(주지 자공스님)의 <치성광여래도>를 종단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최응천)의 긴밀한 협조와 원 봉안처인 송광사의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환수하였다.

지난 6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국외경매시장에 출품된 한국문화재 모니터링 중 <치성광여래도> 1점을 발견하고, 종단과 공유하였다. 본 종단에서는 화기畵記 앞부분의 제작 연도와 봉안 사찰명이 훼손된 상황이었음에도 불화의 화풍과 남아있는 화기를 분석하여 송광사 산내암자인 청진암에 봉안되었던 불화였음을 확인하고 송광사에 이 사실을 알렸다. 송광사는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도 성보 환수에 적극적으로 임하여 마침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국외로의 유출 시기와 이유는 특정할 수 없으나 한국전쟁 등 국내의 혼란기에 유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부(부장 오심스님)와 송광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소장자와의 협의를 통해 6월 28일에 최종적으로 송광사 <치성광여래도>를 영국에서 환수하였다. <치성광여래도>는 7월 21일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7월 23일 종단에서 진행된 환수 고불식 이후 원래의 자리인 송광사에 봉안될 예정이다.

이번 환수는 원 봉안 사찰인 송광사의 적극적인 노력과 의지를 기반으로 우리 문화유산의 환수를 위한 종단, 사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등 민·관 간의 유기적인 협력에 힘입은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과거 운문사 <칠성도>, 봉은사 <시왕도>, 범어사 <신중도>의 환수를 통해 구축한 긴밀한 협력체계를 바탕으로 국외 유출 성보를 보다 체계적이고 다각적으로 환수해 나갈 계획이다.

◆불화의 내용과 문화재적 가치◆

이 불화는 북극성, 북두칠성, 남극성 등 하늘의 별자리를 여래와 성군으로 표현한 치성광여래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후기부터 조선후기까지 조성된 치성광여래도가 전해지는데, 송광사 치성광여래도는 19세기 후반에 전라도를 중심으로 경남, 충남 일부 지역에서 유행한 형식이다.

불화의 화기에 따르면 이 <치성광여래도>는 수화승 향호묘영香湖妙英이 차화승 용선천희龍船天禧와 같이 조성한 것으로 향호묘영의 화풍적 특징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향호묘영과 용선천희는 19세기 후반 전라도에서 주로 활동한 화승들로 조계산 송광사와 선암사에 많은 불화를 제작하였다.

이 불화의 화면 구성을 보면, 화면 중앙에 치성광여래가 있고 그 좌우에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합장을 하고 서 있다. 특이하게 천공天空에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원과 흰 원을 별도로 그렸다. 치성광삼존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칠여래와 칠원성군, 삼태육성이 좌우에 나누어 배치되어 있다. 이 불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표현은 치성광여래의 대좌 아래에 표현된 남극성을 상징하는 자미대제와 28수이다. 이와 같은 형식의 불화로는 수화승 천여와 차화승 묘영이 그린 <용화사 치성광여래도>(1875), 수화승 묘영이 그린 <쌍계사 국사암 치성광여래도>(1879) 등이 알려져 있다. 19세기 후반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그려진 치성광여래도의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는 불화로 중요하다.

▶불화의 봉안 사찰과 유출 시기 추정

불화의 화기 앞부분의 봉안 사찰과 제작시기 부분이 손상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견 당시에는 정확한 봉안 사찰의 추정이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화기의 일부분을 분석하여 봉안 사찰을 추정할 수 있었다.

화기에서 불화 제작에 참여한 승려 중 불화를 그린 스님인 향호묘영과 용선천희가 확인되었는데, 용선천희는 송광사 출신 화승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화주化主 소임을 맡은 월화혁인月和赫演, 지전持殿 혼명성호混冥成昊, 공사供司 혜일惠日 외에 별좌 別座 서봉치문西峰(또는 峯?)致紋, 도감都監 용성길음龍成吉廕(또는 噾?)은 모두 19세기 후반 송광사에 주석했던 스님이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1898년 <대법당 산신도>는 송광사의 산내암자인 청진암에 봉안되었던 불화로, 이 중 월화혁인, 혼명성호, 혜일이 같은 소임을 맡아 불화를 조성한 것이다.청진암은 송광사의 16국사 중 한분인 청진국사가 창건하였으며, 1857년에 치성광여래도를 봉안하는 전각인 성산각星山閣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 전각에 환수된 <치성광여래도>가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청진암은 1908년 의병과 일본군의 전투과정에서 소실되었다가 1919년 중수되었으며, 이후 1927년 성산각이 철거되고, 1938년에는 송광사의 도성당道成堂을 중건하면서 청진암의 재목을 가져다가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때 완전히 폐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암자에 있던 불상을 도성당으로 이운했다는 「도성당중건기(道成堂重建記)」(1938)의 기록이 마지막으로 확인되며 <치성광여래도>는 이 시기 도성당 등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등 혼란기를 거치면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화기에서 명확하게 봉안처가 확인되지는 않지만, 향호묘영이 19세기 말 송광사에서 활동했던 사실, 차화승인 용선천희가 송광사 출신 화승이라는 점, 화주 월화혁인, 지전 혼명성호, 공사 혜일 등 소임과 승려명이 일치하는 불화인 <대법당 산신도>의 존재 등을 종합해 검토해 보면, 이 <치성광여래도>는 1898년에 <대법당 산신도>와 함께 송광사에 조성된 불화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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