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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함기석의 ‘검은 꽃 탄자니아’ 해설

  • 입력 2020.08.2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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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탄자니아 / 함기석

 

  들판 여기저기 탄자니아 꽃이 검게 피어 있다 여자는 죽은 아이 아벨을 거적에 싸안고 노을 번지는 언덕을 내려온다 구릿빛 등의 남자는 샘을 파다 운다 인간의 혀보다 두렵고 거친 배신의 땅

  작은 돌들 사이에서 풀들이 웃고 있다 나는 붉은 천막처럼 펄럭이는 하늘을 배경으로 피 묻은 빨래를 널고 찢긴 마음을 넌다 진흙 논처럼 쩍쩍 갈라진 남자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검붉은 흙물

  공중엔 무쇠 포탄보다 무거운 먹장구름 연대, 여자는 죽은 아이를 내려놓고 맨손으로 구덩이를 판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언덕 위로 아이와 놀던 강의 물고기들이 헤엄쳐 와 구덩이 속을 엿보고

  남자는 말없이 또 땅을 판다 파고 파고 또 파도 나오지 않는 물줄기와 저린 어깨, 앙상히 뼈만 남은 나무뿌리 밑엔 더 앙상하게 뼈만 남은 노인들 아이들, 들판 저편에서 또 포성이 울린다

  거적 밖으로 삐져나온 아벨의 피 묻은 발 하나를 저녁 햇살이 가만히 어루만지고 있다 수시로 포탄이 날아오던 모래능선 위의 하늘이 유리사발처럼 쩍 갈라지고 꽃들의 눈썹이 검게 흩날린다

  깊은 땅 속에서 똥그랗게 뚫린 하늘을 올려다보는 남자, 저 스스로를 직립으로 매장하려는 걸까 어디서 누가 또 죽었는지 흰 풀이 비명처럼 돋고, 여자는 거적에 덮인 아이를 꺼내며 울음을 터트린다

  구덩이 왼편 돌 틈에서 죽은 사람의 발을 닮은 꽃이 하늘하늘 웃고 있다 여자의 가냘픈 숨결처럼 찰랑찰랑 잔물결 일으키며 퍼지는 꽃가루, 약에 취한 새처럼 나는 나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잿빛 시를 낮게 웅얼거리며 빨래를 넌다 남자는 계속 땅속에 둥지 잃은 새처럼 빈 울음으로 서 있고 지옥에서 날아온 부고엽서 같은 노란 나비 한 마리 아물아물 구덩이 주변을 맴돈다

  이 들판 저편 먼 아시아에도 촛불이 타오르겠지 맨드라미처럼 붉은 여자의 잇몸, 아이가 꾸던 단 꿈이 구덩이에 묻히고 남자는 검은 꽃의 지층 어딘가에 있을 천국을 찾아 더 깊은 곳으로 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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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아프리카는 원시 그대로의 순수한 자연을 간직한 신비로운 세계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아, 에이즈와 각종 풍토병 그리고 끝없는 내전으로 얼룩진 절망의 대륙이기도 합니다. 아프리카 동부의 탄자니아 역시 여느 아프리카 국가처럼 기아와 빈곤 그리고 질병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 시에는 죽은 아이를 묻으려 땅을 파는 탄자니아 여인과 파도 파도 물이 나오지 않는 샘을 파는 탄자니아 남자가 나옵니다. 누군가의 단 꿈이 구덩이에 묻히는 동안, “남자는 검은 꽃의 지층 어딘가에 있을 천국을 찾아 더 깊은 곳으로 파들어가야만 합니다. 아프리카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와 더불어 인간 실존의 무게가 느껴지는 마음 아픈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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