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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유미애의 ‘북극곰처럼’ 해설

  • 입력 2020.09.10 15:22
  • 댓글 0

북극곰처럼 / 유미애

 

안드로메다에서 온 고양이의 편지를 읽는 저녁

당신은 한 마리 북극곰처럼 슬픔을 뜯어먹는다

김이 오르는 황혼의 선지 한 그릇을 비운다

이 목젖 뜨거운 만찬은 준비된 것이 아니다

얼어붙은 도시의 뒷거리를 어슬렁거리던 당신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굴 속 같은 은둔지로 돌아오는 중

찢어진 봉투 속에는 우리의 엉덩이 같은 복숭아가 무르고 있다

당신은 중력을 잃고 스러지는 꽃의 성체를 들여다보며

나무에 리본을 묶던 기억과 그 그늘 아래 숨을 거두던 노루의 눈

어느 밤, 당신은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양이처럼

꼬리를 세운 제 그림자에서 그 눈을 발견하고 울컥 서러울 것이다

실내악과 포도주가 향기로운 카펫 위의 식사는 상상으로 족하다

분홍 뺨이 턱수염으로 덮여가는 당신의 저녁

노루의 안마당에는 봉함엽서가 쌓이고 고양이 깡통에는 별이 빛난다

길 잃은 고래를 찾기란 당신이 건기를 나는 것만큼이나 거룩한 일

유빙을 타고 아무르 강 어귀까지 갔던 당신은

마침내 할딱거리는 허공의 심장까지 손을 뻗는다

나는 달동네 쪽마루에 엎드려 긴 일기를 쓴다

너무 깊이 왔다

어둠 곳곳에는 우리의 잇자국과 침 냄새가 배어 있다

내 혀에서는 쇠 종이 울고 당신의 턱수염에선 석유 냄새가 난다

그렇게라도 가슴 속 만년설을 녹이려는 듯

고래섬 너머 불타는 도화원에 닿으려는 듯

리본을 벗겨 반쪽의 달, 검푸른 고양이의 눈을 올려다보며

또 한 끼의 밥을 먹는다

어둠의 심혼이 복숭아꽃처럼 피어나는 차고 순결한 북극의 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서식지를 잃고 유빙을 타고 떠내려가는 북극곰처럼,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꽃처럼, 버림받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양이처럼, 달동네 마루에 누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는 누군가처럼, 가슴 속에 만년설이 가득한 우리는 순결한 북극의 밤을 잘 알고 있는 북극곰. 어느 날 울컥 서러울 수 있는 우리는 실연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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