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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최정례의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해설

  • 입력 2021.01.19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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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 최정례

그러니, 제발 날 놓아줘,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러니 제발, 

저지방 우유, 고등어, 클리넥스, 고무장갑을 싣고 
트렁크를 꽝 내리닫는데…
부드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플리즈 릴리즈 미   
가 흘러나오네
건너편에 세워둔 차 안에서 개 한 마리 차창을 긁으며 울부짖네   

이 나라는 다알리아가 쟁반만 해, 벚꽃도 주먹만 해 
지지도 않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피어만 있다고
은영이가 전화했을 때 

느닷없이 옆 차가 다가와 내 차를 꽝 박네 
운전수가 튀어나와 
아줌마, 내가 이렇게 돌고 있는데
거기서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그래도 노래는 멈출 줄을 모르네

쇼핑카트를 반환하러 간 사람, 동전을 뺀다고 가서는 오지를 않네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내가 도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핸들을 꺾었잖아요
듣지도 않고 남자는 재빨리 흰 스프레이를 꺼내 
바닥에 죽죽죽 금을 긋네

십분이 지나고 이십분이 지나도 쇼핑센터를 빠져나가는 차들  
스피커에선 또 그 노래 
이런 삶은 낭비야, 이건 죄악이야, 
날 놓아줘, 부탁해, 제발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날 놓아줘 

그 나물에 그 밥   
쟁반만한 다알리아에 주먹만 한 벚꽃 
그 노래에 그 타령  
지난번에도 산 것을 또 사서 실었네

옆 차가 내 차를 박았단 말이야 소리쳐도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훌쩍이면서 
여기는 블루베리가 공짜야 공원에 가면
바께쓰로 하나 가득 따 담을 수 있어
블루베리 힐에 놀러가서 블루베리 케익을 만들자구  
플리즈 릴리즈 미,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그러니 제발, 날 놔 줘.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놓아달란 말이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형심 시인

이 시는 잉글버트 험퍼딩크의 ‘릴리즈 미’를 배경음악으로 불쾌지수가 극에 달한 날의 쇼핑센터 주차장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쇼핑카트를 반납하러 간 동행은 돌아오지 않고 친구는 도대체 전화를 끊을 줄 모르는데, 누가 와서 화자의 차를 박아버렸습니다.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남자는 대뜸 소리부터 지릅니다. 그런데도 친구는 전화를 끊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소모적인 일상에 지쳐 이건 삶의 낭비라고 외치는 여자와 차창을 긁는 개를 통해서 반복적인 삶과 권태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현대인의 욕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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