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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일본인 농장 지하 금괴 2톤 매장설!

  • 입력 2021.03.09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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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익산시 주현동 ‘1400억 상당 금괴 2톤 매장설’이 대서특필된다. 『국가등록문화재 일본인 ‘오하시(대교大橋)농장’ 사무실·창고 지하에 금괴 2000kg이 묻혀 있고, 농장주 오하시 손자가 조부 유물이라며 탈북인을 통해 발굴을 시도한다. 탈북인 A씨는 2012년 대구 동화사 대웅전 뒤에 묻힌 금괴 40kg을 발굴하겠다며 문화재청에 국가지정문화재 현상변경 허가를 신청해 조건부 허가를 받았으나 조건을 이행하지 못해 무산됐다는 금괴 소동 당사자다. 동화사 금괴 보도에 접한 오하시 손자는 “조부가 일본 패망 때 재산을 금으로 바꿔 농장 사무실 지하에 묻고 귀국했다.”며 A씨에 발굴을 의뢰해 A씨 등은 토지 매입·임대를 모색하며 발굴 움직임이다. 경찰은 불법행위 및 혼란 우려나 안녕 질서 위협 가능성에 따라 주시 중이다.』는 보도내용이다.

일본인 농장주 국내 간척 및 농지 소유 현황을 보자. 일제는 본토보다 농지가격이 1/10 이하로 저렴한 조선에 진출해 대거 간척이 이뤄졌다. 갯벌과 갈대밭이던 김제 죽산·광활·진봉·청하·만경, 익산 춘포·오산, 군산 대야·회현·옥구·옥서, 부안 동진 등이다. 1930년 도별 일본인 경작지 비율은 호남평야 전북 1위(14.72%)·나주평야 전남 2위(9.02%)·재령평야 황해 3위(5.99%) 순이다. 당시 조선 농지 일본인 소유 평균이 3.97%로 전·남북이 미곡수탈 전초기지였다. 군산 미와자키·구마모토·시마타니·가와사키 농장, 익산(이리) 오하시·익산 춘포 호소카와 농장, 김제 죽산 하시모토 농장이 유명했다. 미곡 반출을 위해 1907년 착수해 1년 반 만에 개설된 ‘전주-군산 도로’와 1913년 개통된 ‘군산-익산(이리) 군산선 철도’도 이들 농장을 통과할 정도였다.

1907년 이리에 최초로 농장을 세운 이가 금괴 매장설 장본인 오하시다. 구마모토(진출 연도 1903년)·호소가와(1904)·오하시(1907) 농장은 1910년 1천 정보(300만 평) 이상 소유한 거대지주였다. 강제병합 후 토지침탈은 노골화됐다. 1926년 1천 정보 이상 소유 일본인 농장주는 9명에 달했고, 대부분 전북에 위치했다. 1922년 ‘대아댐’이 준공되고, 이듬해 ‘대간선수로’ 확장이 시작됐으며, 사행천인 만경강 직강화도 1924년부터 진행됐다. 1928년 오하시 농장은 논만 1300 정보를 소유해 현 익산 도심(구 이리시) 택지 대부분을 소유했다. 

주현동 ‘오하시 농장’ 사무실과 창고 지하가 금괴 매장설 진원지다. 지상 2층 일식 목조 사무실은 1907년 세워졌다. 3.1운동 당시 구 시장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경은 오하시 곡식 창고 습격으로 오인해 창고 담장에서 무차별 발포했다. 때문에 익산시는 근대문화유산인 이곳에 ‘항일역사관’ 조성 계획을 갖고 있다. 수탈현장이어 시는 지난해 10월 부지를 매입했다.

그러나 해방 후, 농장 사무실과 창고 및 부지는 1948년 이리(익산)화교협회가 매입해 학교로 운영하다가 2000년대 폐교됐다. 폐교 이후 일반인 접근이 자유로웠다.

금괴 2톤 매장설은 허구로 끝날 공산이 짙다. 1400억 금괴라면 현재 익산 춘포 농지 1천 필지(120만 평=400정보) 가까이 살 돈이다. 패망 직후, 혼란 상황에 주목 대상인 일본인 농장주 엄청난 금괴 매입은 물론 운반·보관, 지하 6m 매장까지 몰랐을 리 없다. 금괴가 묻힌 땅을 화교협회에 매각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해방 76년이 돼 손자까지 오도록 놔뒀을 리도 없다. 익산시가 매입하기 전, 은밀히 자신들이 매입했어야 한다. 화교학교 폐교 10여 년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는데 이제야 발굴은 더욱 이해가 안 된다. 언론에 대대적 공개는 특히 이해할 수 없다. 자칫 ‘발굴자금 모금(?)’으로 확대될까 우려된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울릉도 부근에서 침몰한 러시아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에 150조 금화·금괴는 대서특필돼 인양까지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굴지 기업이 참여했다며 테마 관련주 작전에 악용되거나 인양 투자자를 모집한 관련자가 구속돼 중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7월 미군 폭격으로 군산 선유도 부근에서 침몰한 ‘2011년 일본 선박 보물선 소동’도 허구로 끝났다.

인간은 누구나 금은보화 등 보물이나 노다지를 좋아한다. ‘보물섬’ 소설도 사람 심리를 적나라하게 서술한 걸작이다. 일제는 1930년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자금을 위해 광산과 금광을 개발했다. 당시 조선은 일본·미국·영국·러시아·독일 등 이권쟁탈 각축장이었다. 금광열풍은 1930년대 극심했다. 35년 작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이나 ‘노다지’도 금광이 소재다. ‘노다지’는 미국인 ‘운산금광’에서 인부들이 금에 손을 대자 “NO Touch!” 즉 “손 대지마”라 외친데서 유래했다. 노다지타령 노래도 이 때 유행됐다.

특히 전북은 “금이 둑을 이뤘다.”는 김제金堤 등 금광과 사금 채취로 유명하다. 김제 금산·금구·봉남·황산면은 일제 골드러시 지역이다. 금산사도 ‘황금산에 있는 절'이다. 금산사는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위치했다. 금산사 입구 저수지는 금평金坪저수지다. 금산면에는 금성리도 있다. 금구金溝면에는 금구리 및 금천金川저수지도 있고,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를 합쳐 금만金萬평야라 하며, 새萬金매립사업도 진행된다.
 
“익산은 서동과 선화공주 금 한 말과 금이 산더미처럼 쌓인 ‘오금산’ 설화가 있고, 보석박물관과 보석가공단지 등 ‘보석도시’이므로 이런 소문이 퍼진 것 같다.”는 시 관계자 언급이다. 허무맹랑한 뜬소문으로 칼럼 소재를 주어 감사한 마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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