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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문성해의 ‘첫밥’ 해설

  • 입력 2021.05.25 11:31
  • 댓글 0

첫밥 / 문성해

- 스무 살의 너에게

 

처음 밥을 짓는다는 건

어느 늦가을 어둑어둑한 목소리의 부름을 받는다는 거,

집에 밥이 없으면

식은 밥통에 슬슬 눈이 가는 나이야

 

처음 밥을 짓는다는 건

희게 재잘거리는 쌀들 속에

보드라운 너의 손을 꽂아본다는 거

너의 이름을 밀어 넣는다는 거,

 

너는 이제 밥이 그냥 오는 게 아님을 아는 나이

비 갠 여름 오후의 그늘에서 밥이 이팝꽃처럼 스르르 풀려나오는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너와는 상관없이 온다고 알았던 신비스러운 나이가

이제 너에게는 없단 거

 

슬프지 않은가,

밥이 없는 초저녁의 쓸쓸함을 아는 나이가 된다는 거,

그래서 유리창에 어둠의 고함소리가 닥치기 전에 슬픔을 휘젓듯 쌀을 씻고

푸푸 밥이 되는 소리에 조금씩 안도하는 나이가 된다는 거

이제 밥은 구름이나 바람, 적어도 너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저 둥글고 깊은 구형 전기밥솥의 동력으로 지어진다는 것을 알아버린 너는

이제 딱딱한 지구의 나이를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거

무엇보다 이 세계의 신비한 마술쇼가 끝났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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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밥값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되면 밥 벌어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철모르던 시절에는 돈 같은 건 마음만 먹으면 쉽게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부모처럼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자기 손으로 밥을 벌어먹어야 한다는 건, 혹은 자기 손으로 밥을 해먹어야 된다는 건, “밥이 그냥 오는 게 아님을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디선가 저절로 밥이 생겨나는 신비한 마술쇼가 벌어지던 어린 시절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래서 슬픈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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