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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아침] 고두현의 ‘늦게 온 소포’ 해설

  • 입력 2021.07.14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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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온 소포 /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 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 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몇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있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르라

 

헤쳐 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 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고향과 어머니는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 아마도 문학작품에 가장 많이 등장한 소재일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 내면 깊은 곳에는 그에 대한 그리움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시골 사시는 어머니가 도시로 나가 일하는 아들에게 유자를 몇 개 보냈습니다. 혹시 가는 동안 향이 다 날아갈까 봐 한지로 겹겹이 싸고 또 싸서 보냈습니다. 화자는 낡은 장갑과 내복을 잘라서 만든 소포 끈을 풀면서 겹겹의 인연으로 이생에 부모와 자식으로 만나 단단하게 묶인 그들의 관계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단단하게 묶인 관계 안쪽에는 분명 유자처럼 향기로운 무엇인가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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