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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김중일의 ‘흙투성이 눈사람’ 해설

  • 입력 2021.08.04 11:11
  • 수정 2021.08.10 16:02
  • 댓글 0

흙투성이 눈사람 / 김중일

세상에는 두 종류의 눈사람이 있대
눈사람과 흙투성이 눈사람
그것은 동면과 불면의 차이지

나는 흙투성이 눈사람 한명을 알고 있어 고백건대 그는 나의 아버지

그가 햇볕으로 가득 찬 마지막 포대를 내 앞에 부려놓았고
달의 저녁 밥상이 한상 그득
차려지자마자 뒤집혀버린 그믐

가혹한 노동에 혹사당한 어깨가 뚝뚝
녹아내리던 그는
내 안에 여기저기 많이 서 있었구나 매 순간
그는 가진 것이 작업복 속의 모래
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흙투성이 눈사람

그는 어느 밤 지구의 뒤편처럼
텅 빈 가슴으로 나를 들쳐 안고
욕조 속으로 들어갔는데

그날 난 아무런 기억이 없는데
서로의 입김으로 체온으로 이미
형체 없이 욕조 속에서 찰랑거리던
그는 마지막 힘을 짜내 순식간에
제 차가운 피부를 배냇저고리처럼 펼쳐
거의 다 녹아 갓난아기처럼
작아진 나를 받아주었네

(언 시간의 백해를 운항하는 지구라는 욕조가 있었어. 그 욕조는 거대해, 지평선과 수평선 사이를 간신히 빠져나갔어. 그는 욕조 속에서 깜박 잠들었어. 공중을 가득 채운 눈송이들이 그에게로 일제히 쏟아졌어. 그를 하얀 봉분처럼 뒤덮었어. 그중에 한 눈송이가 그의 한 눈동자 속으로 스며들었어. 그리고 그는 한밤에 하얀 아가를 낳았어. 아가를 낳았지만 체온이 달라서, 자작나무 껍질에 낀 새벽서리처럼 곱고 차가운 피부를 가진 아가가 녹아 사라질까봐 꼭 안아줄 수도 없었어)

펑펑 눈 오는 날 펑펑 울고 있는
흙투성이 눈사람이 있었대

펑펑 울면 울수록 작아지는 눈물 겹겹이
껴입고 점점 더 몸은 둥글어지고
눈물의 외피가 어마어마하게 커져갔대 울지 마
울지 마 그러다가 이 지구처럼
커다래지겠어 흙투성이 눈사람은
울음을 멈출 수 없었대 몸은 비대해졌대
희미하게 커져갔대 폭설처럼 뿌옇게
흐려졌대 흩어졌대 대기 속으로 스며들었대

그날 밤 우리는 예외 없이
그의 품에 안겨 잠들었대

그날 난 아무런 기억이 없는데
새벽을 철거한 철거반의 증언에 의하면
내가 그 밤의 불순물처럼 새파란
새벽의 욕조 밑에 한줌도 안되는 흙알갱이로
얌전히 가라앉아 있었대

오늘만은 새벽이 올까
새벽만은 항상 왔지
오늘만은 저녁이 올까
저녁만은 매번 왔어
대신 오늘도 우리 몰래

흙투성이 눈사람이 백해 위로 욕조를 띄워 보냈어
한점 까마득히 멀어지는 욕조를 향해 손 흔들며 외쳤어

까모스 까모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시인은 세상에는 “눈사람과 흙투성이 눈사람” 이렇게 “두 가지 종류의 눈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눈물과 땀으로 줄줄 녹아내리는 눈사람이 “흙투성이 눈사람”입니다. 성인이 되어 자기 밥벌이를 하게 되면 먹고사는 일의 고담함이 비로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내 한 몸 지탱하기도 힘든데,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아버지라는 사람의 삶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울까요. “가혹한 노동에 혹사당한 어깨가 뚝뚝/ 녹아내리”는 사람, 무더위에 피와 땀과 눈물을 다 쏟으며 녹아 들어가고 있는 사람, 그들이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흙투성이 눈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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