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서대경의 ‘철도의 밤’ 해설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서대경의 ‘철도의 밤’ 해설
  • 최형심 시인
  • 승인 2021.09.0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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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의 밤 / 서대경 

   철도의 밤이네. 눈 뜨지 않아도, 귀 기울이지 않아도, 어둠 속에 펼쳐진 내 손가락, 내 가방. 기차를 따라 항진하는 내 고통의 소리. 차창을 뒤덮은 성에가 네온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네. 그날 밤, 난방이 형편없는 술집에서 자네와 헤어진 후 무섭도록 많은 가로등들이 켜져 있는 이상한 거리를 헤맸다네. 그러나 그만 길바닥 빙판에 얼굴을 묻고 잠들고 말았지. 그리고 이제 다시, 나는 나의 반복되는 꿈속에 있네. 우울한 마음으로, 내가 타고 가는 기차가 통과해갈 그 익숙한 수많은 철교들을 생각하며. 자네는 그날 밤 무슨 말을 했던가. 거래처의 P에 대해. 미결서류에 대해. 자네와 J양의 쓸쓸한 연애에 대해. 그러고는 심드렁하게 웃었지. 자네와 나는 말없이 서로를 경멸했네. 그리고 이제, 철도의 밤이로군. 아무래도 나는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을 작정인 것 같네. 열차는 줄곧 북상하고 있네. 추위가 점점 견디기 힘들어지네. 어째서 나의 꿈속은 이리도 겨울, 겨울뿐이란 말인가. 언젠가는 이 열차가 멈출 테고 그러면 나는 이름 모를 북구의 작은 정거장에 홀로 내려서게 되겠지. 그리고 나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차표를 끊을 걸세. 이것이 언제나 반복되는 내 꿈의 행로일세. 늘 그래왔듯이 자네는 이런 내 말을 믿지 않겠지만 말이네.

   이 글이 자네에게 전해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네. 어쩌면 꿈 밖의 나는 벌써 깨어 일어나 창백한 몸을 사무실 의자에 기댄 채 내게 할당된 업무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리고 나와, 나를 태운 이 열차와, 어둠 속으로 뻗어가는 겨울의 어두운 광채와, 기차를 따라 항진하는 내 고통의 소리는 모든 꿈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곧 소멸하고 말 것이네. 하지만 친구, 어쩌면 지금도 자네 곁 사무용 의자에 앉아 있을 나를 나라고 여길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J양을? 통근 열차의 흔들림을? 우리 곁을 자전하는 찬란한 업무의 성좌를? 자네는 알고 있을 걸세. 자네는 서류를 필사하는 틈틈이 경멸어린 시선으로 나를 훔쳐보고 있을지도 모르네. 그러나 자네가 알고 있다는 것, 자네가 부인하는 꿈속의 자네 역시 북구의 어느 이름 모를 정거장에서 돌아오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쓸쓸히 기차시각표를 들여다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걸세.

   이제 열차는 불 꺼진 공장지대를 벗어나 눈 덮인 황량한 숲 속을 통과하고 있네. 내 앞에는 책상이 있고, 백지가 있고, 그 위로 흘러가는 겨울 가지들의 무수한 검은 선들. 눈 뜨지 않아도, 귀 기울이지 않아도, 나는 내게 쓰도록 명령하는 집중된 허공을,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내 손의 움직임을 듣고 있네. 자네는 듣고 있나? 들어보게. 밤, 어둠, 고독한 불빛들. 철로를 깨무는 추위, 안개 속으로 사라져가는 철교의 속삭임. 얼굴을 쓸어내리면 두 손에 묻어나는 메마른 불빛. 기차를 따라 항진하는 고통의 소리. 어둠 속에 펼쳐진 내 손가락, 내 가방. 끝없이 이어지는 터널의 어두운 비명을 들으며 나는 자네를 생각하네. 사무실의 뿌연 조명 아래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 자네와 나를 생각하네. J양을 훔쳐보는 우리의 어두운 욕망을 생각하네……. 자네는 듣고 있나? 들어보게. 소멸하는 열차들의 침묵을. 여관방에서 뒤척이는 불면의 밤을. 자네의 눈꺼풀 뒤로 열리는, 영원한 철도의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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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늦은 밤, 화자는 “사무실의 뿌연 조명 아래서” “얼굴을 쓸어내리면 두 손에 묻어나는 메마른 불빛”을 씁쓸하게 바라봅니다. 야근에 지친 몸을 이끌고 동료와 술 한 잔을 하고 헤어진 그는 낯선 거리에서 “길바닥 빙판에 얼굴을 묻고 잠들고” 말았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눈 덮인 피안을 향해 갑니다. 하지만 “열차는 줄곧 북상”만 하고 점점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집니다. 그는 어째서 “꿈속마저도” “겨울뿐이란 말인가”라며 한탄합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터널”과 “기차를 따라 항진하는 고통의 소리” 속으로 점점 사라져가는 “나”…….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꿈을 잃어버리고 종국에는 자기 자신마저 잃어가는 현대인의 복잡한 내면을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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