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독백 / 강재남
저녁이 늦게 와서 기다리는 일밖에 할 줄 모르고 저녁이 늦게 와서 저녁 곁에서 훌쩍 커버릴 것 같았다
담장에 기댄 해바라기는 비밀스러웠다 입술을 깨물어도 터져 나오는 씨앗의 저녁
해바라기의 말을 삼킨 나는 담장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물기 없이 늙고 싶었다
저녁이 늦게 와서 내 말은 먼 곳으로 가지 못하고 아직 쓰지 못한 문장이 무거웠다 생의 촉수는 무거운 침묵으로 뿌리내리고
내가 나를 알아볼 때까지 등을 쓸어안아야 했다
꽃잎 떨어지는 소리가 눈동자에서 글썽이는 걸 알았다면 어떤 죄책감도 담아두지 마라 할 걸 말이 말이 아닌 게 되어 돌아왔을 때 여전히 침묵하지 마라 할 걸
저녁은 저녁에게 총구를 겨누고 저녁의 총구에서 검은 꽃이 핀다는 걸
저녁이 늦게 와서 알지 못했다 저녁이 늦게 와서 놀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은하를 건너간 젊은 아버지 등을 떠올렸다
저녁이 늦게 와서 나비가 만든 지문을 해독할 수 없었다 핏줄 불거진 손가락에서 누설되지 않은 어둠을 끝내 당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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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인간의 삶을 ‘기다림’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이란 오지 않는 그 무엇을 끝없이 기다리는 한 편의 부조리극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저녁”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저녁이 늦게” 오는 바람에 “기다리는 일밖에” 할 줄 모르게 되었다고 원망합니다. “생의 촉수는 무거운 침묵으로 뿌리내리고”, “놀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 “나비가 만든 지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도 전에 나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고 말입니다. 결국 “저녁이 늦게” 오는 바람에 시인의 “말은 먼 곳으로 가지 못하고 아직 쓰지 못한 문장”은 제자리에서 무거워지고 말았습니다. 이 시의 “저녁”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일 수도 있고, 삶의 의미일 수도 있고, 희망일 수도 있고, 기적일 수도 있습니다. 저녁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건, 인생이 기다림의 다른 말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