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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강재남의 ‘표류하는 독백’ 해설

  • 입력 2021.12.1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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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하는 독백 / 강재남

 

  저녁이 늦게 와서 기다리는 일밖에 할 줄 모르고 저녁이 늦게 와서 저녁 곁에서 훌쩍 커버릴 것 같았다

  담장에 기댄 해바라기는 비밀스러웠다 입술을 깨물어도 터져 나오는 씨앗의 저녁

  해바라기의 말을 삼킨 나는 담장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물기 없이 늙고 싶었다

  저녁이 늦게 와서 내 말은 먼 곳으로 가지 못하고 아직 쓰지 못한 문장이 무거웠다 생의 촉수는 무거운 침묵으로 뿌리내리고

  내가 나를 알아볼 때까지 등을 쓸어안아야 했다

  꽃잎 떨어지는 소리가 눈동자에서 글썽이는 걸 알았다면 어떤 죄책감도 담아두지 마라 할 걸 말이 말이 아닌 게 되어 돌아왔을 때 여전히 침묵하지 마라 할 걸

  저녁은 저녁에게 총구를 겨누고 저녁의 총구에서 검은 꽃이 핀다는 걸

  저녁이 늦게 와서 알지 못했다 저녁이 늦게 와서 놀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은하를 건너간 젊은 아버지 등을 떠올렸다

  저녁이 늦게 와서 나비가 만든 지문을 해독할 수 없었다 핏줄 불거진 손가락에서 누설되지 않은 어둠을 끝내 당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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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인간의 삶을 기다림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이란 오지 않는 그 무엇을 끝없이 기다리는 한 편의 부조리극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저녁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저녁이 늦게오는 바람에 기다리는 일밖에할 줄 모르게 되었다고 원망합니다. “생의 촉수는 무거운 침묵으로 뿌리내리고”, “놀이 어느 쪽으로 가는지”, “나비가 만든 지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도 전에 나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고 말입니다. 결국 저녁이 늦게오는 바람에 시인의 말은 먼 곳으로 가지 못하고 아직 쓰지 못한 문장은 제자리에서 무거워지고 말았습니다. 이 시의 저녁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일 수도 있고, 삶의 의미일 수도 있고, 희망일 수도 있고, 기적일 수도 있습니다. 저녁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건, 인생이 기다림의 다른 말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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