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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강인한의 ‘죽은 나무를 위한 아르페지오’ 해설

  • 입력 2022.06.1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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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무를 위한 아르페지오 / 강인한

 

흐르는 저 물길 위에 그대 욕망의 물결이 베일처럼
가벼이 흔들리는 게 보이는가, 술탄이여.
죽은 자들의 그림자 우쭐거리는 밤마다 죄를 머금은
이슬은 사이프러스의 촉수 끝끝마다 별빛을 끌어내린다.

장미꽃이 초록빛 작은 입술을 내밀어 관능의 목을 축이는 밤마다
인간의 슬픈 기원이 들린다. 방울방울
젊은 목숨들 잦아진 곳,

한때는 소리 없이 밤새처럼 한 쌍의 그림자 스며들어
죽음도 무릅쓰는 사랑에 기뻤으매
비단바람이 어루만져 나뭇잎을 환희에 떨게 하였으며
생명의 음률을 스스로 읊으며 분수가 뿜어져 나오게 하였는데

금기를 범하여 처단된 술탄의 여인,
그 사랑하는 병사와 더불어 목이 걸렸고
저들에게 밀회의 장소를 제공한 죄로 나는 뿌리를 잘렸다.
처형의 전말을 목격한 죄로 나는 가지를 잘렸다.

죽어서 이루지 못한
슬픔으로 피는 꽃들의 이름을 아아, 나는 모른다.
그 밤의 천둥 속에서 소스라치던 내 이름도 잊고
몇 백 년 물길은 흘러서
이제는 시간의 흐름도 잊었으니.

불꽃처럼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먼 데서 깊은 밤 사자들이 배회하고
설화석고 흰 돌에 얼굴을 비추는 벙어리, 물의 정령들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며 아라베스크의 춤을 출 때면
횃불에 비친 궁전의 벽은 핏빛으로 어룽지고 있거늘, 술탄이여

나는 다만 눈뜬 채 영원히 사라지지 못하는 한 개 나무토막,
이 깊은 성안에서 잠 못 드는 영혼들 하염없는 손짓을 기억할 뿐
한 그루 죽은 나무로 나는 여기
불멸의 사랑을 증언하기 위해 아람브라의 정원에 서 있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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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남녀가 자유롭게 만날 수 없었던 시절에도 수많은 사랑 이야기가 존재했습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는데 말입니다. 아마 하렘에 갇힌 술탄의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이 작품 속, 금지된 사랑에 빠진 가련한 젊은 연인들은 밤마다 남들의 눈을 피해 알람브라 궁전의 정원에서 밀회를 즐겼습니다. 결국, 술탄에게 발각되어 두 젊은 목숨은 나란히 사이프러스 나무에 걸린 채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밀회의 장소를 제공한 죄로사이프러스 역시 뿌리와 가지를 잘렸습니다. 그렇게 죽은 나무는 아직도 알람브라 궁전 구석에 남아, 한 이름 없는 병사와 술탄의 여인의 이루어질 수 없는 불멸의 사랑을 낯선 관광객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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