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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기형도의 ‘물 속의 사막’ 해설

  • 입력 2022.08.10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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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의 사막 / 기형도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 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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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느닷없이 쏟아진 폭우가 가장 낮은 곳의 보금자리를 휩쓸고 가버렸다는 가슴 아픈 소식이 들려옵니다. 안타까운 소식에 기형도 시인의 시를 떠올렸습니다. 밤 세시,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깨어난 시인은 홍수로 흙탕물에 잠겨버렸던 고향의 옥수수밭을 떠올립니다. 고향을 떠나올 때, 그는 아버지처럼 헛된 삶은 절대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비바람에 꺾여 이리저리 쓸려 다니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이파리에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이 겹쳐 보입니다. 세상 풍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이 그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는 시인, 이건 그저 악몽일 문이라고 울부짖지만 그 악몽에서 깨어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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